말씀과 마음씀2023. 3. 26. 16:20

[우리들교회 주일설교말씀 요약메모 (326일 마태복음 57절 "팔복산의 통로")와 느낀 점]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김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미국전도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신 김양재 담임목사님이 몇 주 만에 우리들교회 휘문 채플 강대상으로 복귀하셨습니다. 미국 여행이 유럽여행보다 시차 극복의 어려움이 더 심하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것은 40년간 200만 마일이 넘는 대한항공 탑승을 통한 출장을 통해 익히 경험한 바 있어서 입니다.

 

 

(김양재 담임목사님<가운데>과 함께/휘문 채플)

 

 

그럼에도 오늘 주일 첫 1부설교 타임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은혜가 넘치는 설교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열쇠로 잠긴 곳을 열게 해 주시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맺어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파라클레토스)의 감동 감화가 충만한 운행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의 은혜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코이노니아’(교제)가 지구 땅끝까지 흩어져 있는 주님 공동체의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좋은 화장품은 (1)몸 건강, (2)마음 건강, (3)정신 건강에서 나오는데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나기에 "천국표 영생화장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최고의 감정인 회개(悔改/repentance)와 긍휼(矜恤/mercifulness/commiseration)의 실천을 통해 평강과 평안과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팔복산의 통로는,

 

1.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1)  긍휼은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은 (1)비교 의식과 (2)우월감과 (3)자기만족에서 나오기에 나중에 생색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선함을 기억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2)긍휼은 조건적이 아닙니다

 

-조건 적, 상식적 측면을 하나님은 바로 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누구나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고 공평합니다. 고난은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긍휼은 작은 것부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 죄를 보게 되면 타인의 고난과 아픔이 체휼되어 지적 질이나 단순한 동정심이 아닌 진정한 긍휼을 느끼게 되어 낮아짐으로 섬기게 됩니다.

 

(적용 #1)

 

1)  남을 불쌍히 여김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동정하나요?

2)  의인과 죄인을 차별하는 긍휼인가요? 무조건 적 인 주님의 긍휼인가요?

3)  우리 모두가 밑 둥 짤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나요?

 

2.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긍휼은 엘레오스’ (자비) 그리고 헤세드(자비)와 라함’(어머니 자궁에서 유래되어 슬픔과 애통함으로 공감하는 것)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의 여김을 받았습니다.

긍휼은 구원의 반석 위에 서있어야 가능합니다. 긍휼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사랑의 감정으로 어떤 높이와 깊이와 넓이로도 가늠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

 

실천적 긍휼의 예화로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1만 달란트의 빚 탕감의 긍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서도 나중에 100데나리온이라는 아주 작은 빚에 대하여 분노하며 긍휼로 나아가지 못하며 힘들어 하는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과 해달별이 떨어지는 환난도 온 집안의 구원을 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긍휼로 갚아 주시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팔복의 삶은 오늘 죽어도 천국을 갈 수 있는 마음으로 긍휼의 통로가 됩니다. 동정이나 자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기 때문에 비로서 타인에 대한 긍휼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시던 군중도 본성이 똑 같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없게 하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빚진 자는 타인에게도 긍휼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긍휼을 통한 우리는 구원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독된 것의 1위는 자식입니다. 자식이 곧 나니까 나의 분신이 세상에서 잘 나아가야 하는데 그리 못하면 분노가 나오게 되며 기대 못 미치면 나오는 분노는 중증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므로 그것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존재인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말 선지자 호세아(구원이란 뜻)의 복잡한 가정사 이야기를 통해 30년 후 닥칠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고멜(끝이 다한 창녀)과 결혼함으로 북 이스라엘 멸망의 메시지를 호세아 결혼 비유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소명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교회 큐티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큐티입니다. 어떠한 황당한 상황에서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처럼 본 부인이 바람난 남편의 내연 녀 집 앞에서 여보를 외치는 것이 옳고 그름으로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함으로 하는 헤세드의 적용입니다.

 

(적용 # 2)

 

1)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며 정죄하는 사람이 없나요?

2)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3.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을 데리고 팔복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시는 주님말씀처럼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는 용서가 아니라 기도로 슬픔과 애통으로 참자가 끊어지는 듯한 긍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는 힘든 사람을 팔복산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며 내 죄를 깨닫고 원수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도록 헤세드라함으로 팔복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야 합니다.

 

긍휼을 바든 존재에 불과한 우리는 긍휼의 근거가 주님이기에 그 앞에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죄와 부족함을 느끼기에 타인의 부족함에 대하여 내 부족함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섬기다 보니 나에게 부족한 긍휼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뽀빠이 이상용처럼 강력하게 손과 발이 함께 가는 적용으로 새 방언을 쓰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므로 부족한 사람에 대하여 헤세드로 대함으로 나의 부족함이 메워지는 것입니다.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있는 것이 내 복이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그래서 부족해 보이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적용 #3)

 

1)  용서해야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하나요?

2)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임을 믿나요?

3)  부활절전도축제에 내가 팔복산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 위하여 어떤 순종을 하고 있나요?

 

긍휼함을 느끼는 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으면 그것이 다 간음이라고 하신 주님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긍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느끼는 사람이 타인의 긍휼을 체휼하는 것입니다.

 

팔복산의 긍휼을 맛 봅시다! 샬롬!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