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세상2024. 4. 27. 11:01

[Well Being and Well Aging Life Style (각종 Flu 퇴치 비결)]

 

아래 글은 15년 전인 2009년에 제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지금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 다시 올려 드립니다.

 

(반기문 제8UN사무총장님 출판기념회)

 

 

[신종플루, 구종 플루, 별종 플루, 모두 벗어나려면? (올림픽현장에 등장한 반기문 제8UN사무총장의 건강한 모습/사진 아래) 20091113]

 

 

<현재상황>

 

신종플루뿐만 아니라 각종 질환, 질병이 그야말로 창궐(Pandemic)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전세계가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가 공공기관, 의료기관등에서 신종플루를 예방하고 퇴치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뾰족하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아직 오리무중인 것 같군요. 물론 손도 잘 씻고 개인위생에 철저해야 되겠지요.

공공기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영화관, 연극 공연장, 헬스 클럽, 요가 및 단전호흡 수련장, 학교, 학원, 각종 세미나 장, 식당, 백화점, 주점, 편의점, 옷 가게, 병원,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 스포츠이벤트 모임, 비행기 여행, 국제행사 등등 사람이 함께 모이지 않는 곳에서 생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환경의 현대인생활이 빚어놓은 불가피한 패러다임속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호흡하고, 만나서, 먹고, 마시고, 마주보고, 부딪히고, 말하고, 맞추면서 매일매일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의 주인공들입니다.

 

<''권하는 사회, 속수무책의 사회생활환경과 건의사항>

 

아무리 개인위생에 철저 해도 타미플루예방접종을 하여도 각종 공해와 환경호르몬이 즐비한 생활여건 속에서 우리 인체는 미세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형적으로 아주 조금씩 일그러지고, 유린당하고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인체에 좋지않은 성분인 인공 조미료, 인공감미료등이 함유된 각종 인스턴트 식품과 음료유전자변형(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식품 등이 우리들 먹거리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인체의 면역력이 점차 취약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현대인생활의 먹거리 마실 거리 패턴을 강제적으로 통제하고 억누르면서 한국전통 건강식인 슬로 푸드(Slow Food)만을 먹어야 한다고 강권할 수만 도 없습니다.

대형 마켓에 보기 좋게 신선한 모습으로 먹음직스럽게 진열된 각종 채소와 과일 등에 눈에도 보이지 않고 냄새도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잔류농약성분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집에서 조리하기 전에 천일 염 왕소금을 한웅큼 물에 풀고 그 소금물 속에 채소류, 과일 등을 씻고 행구면 좋다고 합니다. 번거롭고 귀찮은 대목이긴 하지만...

일회용 종이컵 속 표면에 코팅처리되어 있는 물질은 뜨거운 커피나 물 등이 닿을 때 아주 극소량이긴 하지만 함께 녹아 우리가 마실 때 우리 인체로 흘러 들어가 중금속 등 환경호르몬이 체내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자기 류로 제작된 개인전용 머그컵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환경도 위하고 우리 인체도 위하는 길입니다. 이 또한 귀찮고 번거롭겠네요...

중국산 양은 냄비 등 조리기구등도 조심스럽게 구입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불에 달구어 지면 금속 조리기구등에서 중금속 성분과 환경호르몬이 방출되어 음식과 섞여 우리 몸에 잠입하기 쉬우니까요. 조리기구에도 '환경친화-인체 무해 인증마크제도화'를 실시하면 어떨까 정부에 건의 드리고 싶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인체에 어쩔 수 없이 쌓이는 각종 ''(Poison)을 사후에라도 처리해야 되겠지요. 신종플루 등 각종 질병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 인체의 면역력기능저하와 해독기능약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각종 플루 퇴치 방법>

 

우리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해독을 생활화하여 신종플루등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생강"(生薑; Ginger)입니다. 중국 등지에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대장금>이라는 TV드라마에서 장금이(이영애 분)가 생강을 달여 그 물을 식중독에 걸린 사람들에게 마시도록 해 치료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
생강에는 식중독을 일으키는 나쁜 균에 대한 살균, 항균작용이 있다. 생강의 맵싸한 성분은 진저롤과 쇼가올이 주성분이며, 향기 성분은 여러가지 정유성분인데 이 정유들이 매운 성분과 어울려 티푸스균이나 콜레라균 등 세균에 대한 살균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진저롤과 쇼가올은 여러 가지 병원성 균에 대해 강한 살균작용이 있다. 이처럼 생강은 오래 전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중요한 식품이면서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건강식품이었다."

 

<거악생신(去惡生新: 나쁜 毒 제거하고 새 살, 새 피를 만듦)하는 생강의 힘>

생강은 나쁜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나오게 하는데 가장 뛰어난 식품이다. 맛이 매운데, 잘 음미해 보면 단맛과 쓴맛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강한 해독 작용을 한다. 인체 조직의 나쁜 부분을 제거하고 새 살을 돋우어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며 변질되어가는 물질을 완전 재생시킬 수 있는 놀라운 '거악생신(去惡生新)' 효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속이 거북하거나 매스꺼움, 딸꾹질 등을 멈추는 작용도 있다. 동의보감에서 건강(乾薑)은 구풍, 소화제로서 양을 돋우며 냉을 제거하는데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강에는 소화액의 분비를 자극하고 위장의 운동을 촉진하는 성분이 있어 식욕을 좋게 하고 소화흡수를 돕는다. 그리고 생강에는 디아스타제와 단백질분해효소가 들어 있어 생선회 등의 소화를 돕고 향미 성분은 소화기관에서 소화흡수를 돕는 기능도 한다. 생선회를 먹을 때 생강을 곁들여 먹는 것도 다 음식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생강의 거악생신라는 힘이야말로 화공약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약이라는 것. 그래서 생강차를 끓여 부지런히 마시라고 했다. 그 생강차를 대추와 감초를 한데 넣고 끓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생강-감초-대추를 4:3:1의 비율로 하면 좋다. 요즘같이 공해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이 꼭 마셔야 할 해독작용이 있는 차다.

생강은 몸에서 냄새 나는 것을 없애고 몸에 좋은 것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으며 정신을 맑게 해준다. 생강은 나쁜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나오게 하는 데, 가장 효과 높은 묘약이다. 냉증과 통증, 소염, 진통, 염증, 코 막힘, 악취를 없애고 소아경기, 타박상, 소화불량, 부종, 수종, 치질 등에 두루 쓰이는 신묘한 식품이다. 또한 생강에는 중요한 미네랄인 아연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아연은 목에서 호르몬을 생산하는 갑상선에 작용해 신진대사와 혈행을 좋게 하는 작용을 한다.

생강과 감초를 같은 양 넣어 물에 끓여 하루에 세 번 이상 마시면 성인병이 예방됨과 동시에 몸에서 나는 악취가 없어지고 구토증, 식중독, 산후 복통이 없어지며 양기가 강해진다. 몸살 감기에 진한 생강차를 마신다.

(주의사항: 약성이 강하므로 하루에 많이 마시지 않는다. 임산부는 이용을 피하며 옹창, 치창, 위열 후통 등에도 이용을 피한다.)

몸이 냉하여 겨울이면 기침 감기를 달고 지내는 사람도 생강감초차를 장복하면 몸이 따뜻해지며 감기(플루)정도는 능히 물리칠 수 있다. 감초는 중화, 해독 및 촉매역할을 하기때문에 모든 약에 들어가게 되며 그래서 '약방에 감초'라는 칭호도 붙게 되었다.
여행가서 음식 등 조리할 때 감초를 조금씩 넣으면 해독작용이 있어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다."
(
인산 의학 2009.10월호)

 

<생강-대추-감초 삼총사로 구성된 해독 차 마시기 캠페인>

 

우리주변에서 쉽게 구 할 수 있는 '해독제 친화 식품섭취'를 상용화하면 그 어떤 플루도 예방할 수 있으며 무병장수의 인체면역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생강-대추-감초 차,' 마시기 캠페인'을 시작하면 어떨까요?

'
체력은 국력'(Physical strength is the source of national power.)입니다.

날씨가 추워질 수록 실내에서는 저녁 뉴스 보면서 스트레칭하고 시간 날 때마다 '동네 한바퀴' 걷는 가벼운 스포츠 활동 그리고 위에서 설명 드렸던 '환경친화적-건강 친화적 식습관 및 식생활습관' 바로 이것들이 '신종플루, 구종플루, 별종플루' 등을 미연에 확실하게 예방해주고 건강 무병장수의 비결은 아닐까요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 원장
윤강로

 

(2009 10월 덴마크 코펜하겐개최 제121 IOC총회와 함께 개최 된 올림픽 콩그레스에서 UN수장으로서 올림픽 사상 최초로 기조연설을 한 반기문 UN사무총장과 함께 한 필자/수 많은 해외출장에도 어김없이 건강하신 반기문 UN총장님의 건재한 모습은 그 자체가 국보급 우리나라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윤강로
스포츠 외교2024. 4. 26. 00:56

[소련(러시아)의 세계적 스포츠외교관 Vitaly Smirnov IOC부위원장에 대한 회고(“김운용이 만난 거인들책에서)]

 

 

Vitaly Smirnov는 러시아 최고의 스포츠외교관으로 김운용 IOC부위원장과 어깨를 견주며 세계스포츠계를 장악했던 세계 스포츠 지도자이며 현재 IOC명예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좌로부터 Vitaly Smirnov 러시아 IOC부위원장 겸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위원장, 당시 KOC국제부장이었던 필자, 장주호 KOC부위원장,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 김성규 KOC국제본부장/1990년대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러시아 NOC스포츠교류협정 체결 후)

 

 

[Vitaly Smirnov (2010. 11.2) 모스크바에서 소치까지 그가 뛰었다]

 

비탈리 스미르노프(Vitaly Smirnov) IOC 위원(구 소련-현 러시아)은 소련이 1952년 헬싱키(Helsinky)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스포츠를 통한 동서냉전을 시작할 때부터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그리고 2014년 민주화된 러시아의 소치(Sochi)의 동계올림픽 유치까지, 그 긴 여정 속에서 오늘의 러시아 스포츠가 있게 한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35년 시베리아의 하바롭스크(Khabarovsk)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시베리아로 곰 사냥을 가기도 하고, 필자에게는 곰 쓸개를 갖다주곤 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사회과학대학교의 체육교육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수영, 수구(Water-polo), 테니스, 복싱을 했고, 1970년에서 1975년까지 소연방 체육성의 제1차관, 1981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대통령 옐친)의 체육장관, 1990~1992년 소련 NOC 위원장, 1992~2001년까지 러시아 NOC 위원장도 지냈다. 소연방 붕괴로 체육에 대한 소련의 강력한 국가지원체제가 없어지자 스미르노프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러시아 NOC를 소생시키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다.

그의 진가는 제22회 올림픽,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조직위원회(위원장은 노비코프)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드러났다. 앞서 1971년에 IOC위원이 된 바 있는 그는 대부분의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장()은 정치지도자가 맡고 실제 실무책임은 수석부위원장이 도맡아 처리하듯 모스크바올림픽의 많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승리국가라는 자긍심에서 이제는 스포츠에서 제일이 되겠다는 의욕으로국가 스포츠체제로 나갔다. 1980년은 미·소 냉전시대로서 두 나라가 세계의 힘을 양분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였다. 소련은 스포츠를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그때 돈 80억 달러를 투자해 모스크바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런데 소련에게나 IOC에게나 큰 시련이 닥쳐왔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의 카터(Carter) 대통령이 각국에 올림픽 보이콧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의 IOC 위원장인 킬라닌(Killanin) 경이 카터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부터 올림픽 보이콧의 역사가 시작됐고, 88서울올림픽 때도 국교가 없는 소련 등 동구권의 보이콧 방지를 위해 무척 노력해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때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 등 참가를 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지만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가한 NOC도 있었다. 영국이 대표적인 예인데 현재 2012런던올림픽 조직위원장인 세바스찬 코(Sebastian Coe)가 당시 육상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서방의 보이콧으로 킬라닌 위원장은 참가국 수를 60개국 정도 예상했는데 결국 81개국 5000명이 참가했다. 반쪽 올림픽이지만 일단 시작하니 올림픽은 역시 올림픽답게 빛이 났고, 소련은 사회주의국가로는 처음으로 국력을 과시했다. 또한 IOC총회에서는 킬라닌(Killanin)의 뒤를 이어 사마란치가 IOC 위원장에 당선되어 올림픽 중흥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사마란치에게 아디다스의 다슬러(Dassler) 회장이 상당한 지원자금을 썼다고 한다. 또 모스크바 IOC총회에서는 세계태권도연맹(WTF) IOC승인단체가 되었다.

이 무렵 IOC의 자금은 고작 100만 달러 정도였다. 이때부터 사마란치는 재정파탄 위기에 처해 있던 IOC를 본격적으로 마케팅(Marketing)하기 시작해 오늘날의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키워냈다. 모스크바올림픽 때 미국의 NBC 방송이 8000만 달러(76년 몬트리올올림픽은 미국 ABC 2500만 달러) TV방영권계약을 했지만 미국의 보이콧으로 방영권이 취소되어 큰 손해를 봤다. 이 때문에 88년 서울올림픽의 TV방영권 교섭이 미국 NBC의 각종 까다로운 보장 요구로 고전하게 된 것이다.

 

서울올림픽 준비기간에 스미르노프는 그라모프(Gramov) 장관, 가브릴린(Gavrilin) 차관에 눌려 상당히 조심성 있게 행동했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IOC를 통해 기지개를 폈고, 러시아의 정치적 격동기에도 살아남았다.

서울올림픽 준비 차 모스크바에 갈 때마다 공식적으로는 소련 체육성이 교섭 창구였지만 개인적으로 스미르노프의 인맥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문화성, 방송위원회 등이다. 타스(Tass)통신 사장이고 고르바초프(Gorbachev)의 공보비서가 된 이그나텐카(Ignatenka)도 그의 친구다. 스미르노프는 이때 옐친(Yeltsin)이 이끄는 러시아공화국의 체육장관이었는데 얼마 안 가서 옐친의 러시아공화국 정부 개편으로 자리를 잃었다. 소련이 공산체제에서 냉전을 거쳐 옐친, 푸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실각하고 큰 변천이 있었지만 스미르노프는 노비코프(Novikov)를 도와 모스크바올림픽을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그 후 러시아 NOC 위원장도 맡아 소련붕괴 이후민주 자율 NOC’ 재건에 성공했다. 필자와는 여러 가지로 협조관계를 계속 이어왔다.

2002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 유치를 전후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워졌고, 모두들 서방국가로 나오려 했다. 스미르노프는 필자가 미국에 아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자기 친구의 여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소개를 해줬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솔트레이크 사건 때 입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왔다. 자기는 너무 공격의 목표가 되어있어 그것까지 표면화되면 더 어려우니 자기 부탁이라고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없는 필자가 뒤집어썼다.

2000
년 시드니올림픽 때 태권도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되어 경기를 관장하고 있는데 스미르노프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국과 러시아가 결승에 맞붙었는데 금메달 수가 모자라니 러시아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필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결국 중국이 금, 러시아는 은이 돼 버린 바 있다. 시드니는 서울올림픽 때 러시아가 1, 동독이 2, 미국이 3위를 할 때와는 달랐다. 국가가 돈을 대다가 고르바초프 체제의 재정파탄으로 NOC도 스폰서를 잡아야 운영이 가능한 처지가 된 것이다. 아이스하키 등 우수한 선수는 모두 미국 프로팀으로 가버리고 스폰서도 붙지 않고 스미르노프 혼자 악전고투를 했다. 그는 올림픽의 프로화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마란치가 애틀랜타올림픽에 미국농구 NBA의 드림팀을 출전시키려 했을 때 강력히 반대했다. 보통 선수와 경쟁이 안 되는 불공정하고, 올림픽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리를 추구하는 사마란치에게 이것이 통할 리 없었다.

88
올림픽 때 김대중 평민당 대표가 자오즈민과 안재형의 결혼성사를 사마란치에게 부탁했듯이 88올림픽 후 한국인 최초로 피아니스트 김혜정(필자의 딸)을 모스크바 음대에 유학을 보내는 데도 국교가 없는 상태라 사마란치가 소련문화성에 요청하고 스미르노프가 대부 역할을 했다. 김혜정이 소련문화성 오케스트라와 로즈데르벤스키(Rozdervensky) 지휘로 CD녹음을 한 것도 스미르노프가 노력한 결과였다.

스미르노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일은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 발생했다. 즉 스미르노프의 무게 있는 역할이 올림픽운동을 살리고, 실패로 낙인 찍힌 로게(IOC 위원장) 주도의 첫 번째 올림픽을 살린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렇다. 한국이 김동성 사건으로 보이콧 얘기가 나올 때였는데 러시아는 피겨스케이팅 페어종목에서 프랑스 조의 감정적인 호소와 읍소로 금메달을 놓고 큰 갈등을 빚었다. 이게 문제가 돼 며칠을 끌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비난했다. 러시아팀이 즉각 철수하고 아테네올림픽에 불참한다고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국팀도 솔트레이크올림픽폐회식에 불참한다는 소문이 돌아 IOC 위원장인 로게를 긴장시켰다. 필자는 로게의 청으로한국은 지금까지처럼 성공적인(These Succesful) 올림픽 폐회식에 참가한다, IOC가 초안을 잡은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무엇이 성공적이냐고 MBC 등 한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사실 우방 미국에서 9·11테러 직후에 열린 올림픽이고, 특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신중해야 했다. 호주심판의 부당판정을 합법적으로 ISU IOC에 항의하고, 시정조치를 기해야지 보이콧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푸틴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행정편파와 상업주의로 인한 실패한 대회라고 공격하고, 러시아의 여당은 선수를 귀국시키고 러시아의 알루미늄 회사 루살(RUSAL)은 법적소송을 건다고 협박했다. 이때 그 모든 것을 완화, 진정시킨 것이 당시 NOC 위원장은 아니었지만 IOC 위원이었던 스미르노프였다. 이때 스미르노프는 한국과 공동전선을 펴기 원했는데, 한국의 성명서 발표는 러시아가 보이콧을 안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나중에 로게는 필자가 솔트레이크올림픽을 살렸다고 공언까지 할 정도였다. 로게는 신속히 움직여 캐나다에도 금을 주고 실격된 러시아의 크로스컨트리 선수가 실격 전에 딴 은메달 2개를 회복시켰다.

2007
년 로게는 크렘린(Kremlin)에 초대받아 갔다. 과테말라 총회에서는 직접 참석한 푸틴이 원하는 대로 소치가 한국의 평창을 제치고 2014년 동계올림픽을 따갔다. 앞서 소치도 1990년에 이미 한 번 후보도시로 나온 적이 있다.

얼마 전 스미르노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미 삼아 들으라며 모스크바에서 한국 외교관이 찾아와서 평창지지를 호소하기에너희 나라에 IOC 위원의 대부분의 존경을 받고, 또 많은 외신기자들의 존경을 받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있는데 왜 거기 가서 요청하지 자기에게 와서 말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 외교관은 서울에 보고하겠다며 갔는데 이것을 스미르노프는 코미디라고 했다.

한참 전에 모 정부 고관이 문화행사로 모스크바를 가는데 스미르노프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전화를 걸었더니 스미르노프는 소치(Sochi) 회의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좀 올라오라고 요청했더니 밤에 올라와 그 다음날 한국 고관을 영접해 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만났는데 별 이야기는 없고 인사예방이었다고 했다.

스미르노프는 IOC 집행부에서 근 20년 봉사했고 소련의 국가체제 스포츠를 맡아 모스크바올림픽을 성공시켰다. 소련의 국책대로 임무를 잘 수행한 것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민주 러시아의 스포츠를 연착륙시켰고 러시아가 원하던 하계올림픽에 이은 소치동계올림픽을 20년 걸려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IOC 내에서 아직도 영향력이 지대하다.

김운용 前 IOC 부위원장

 

Posted by 윤강로
스포츠 외교2024. 4. 25. 09:49

[브라질의 불세출 스포츠외교관 아벨란제(Havelange) FIFA회장 겸 IOC종신위원에 대한 회고(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책 중에서)]

 

아벨란제(FIFA회장 중 최고 거목으로 알려져 있으며 브라질을 빛낸 최고의 스포츠외교관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는 Rio 2016올림픽 기간 중인 2016816일 향년 100세로 영면에 들어 갔습니다.

 

그는 세계스포츠계 라틴 마피아의 주축 중 한 명으로 당시 최고의 실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20221229(향년 82) 암 투병 중 사망한 축구황제 Pele와 함께 브라질을 세계스포츠계에 각인한 영웅들이었습니다.

 

 

(故人이 된 브라질 축구황제 Pelé와 브라질 출신으로 작고한 Havelange FIFA회장과 함께)

 

 

 [39화 아벨란제 IOC종신위원(2010/9.28)]

 

아벨란제 하면 오늘의 FIFA 월드컵을 이뤄 놓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축구세계선수권대회(FIFA World Cup)를 단일 종목이지만 올림픽에 버금가는, 지구촌을 열광시키는 스포츠 이벤트로 격상시킨 주인공이다. 웨파컵(European Cup)도 그 규모와 열기는 거대하다. 그러면서도 IOC의 라틴 4인방 중 아직도 IOC의 유일한 종신위원으로 건재하다. 지난달 튀니지(Tunisie)의 음잘리(Mzali) 위원 사망으로 아벨란제가 1966년 전에 지명된 유일한 종신위원으로 남게 됐다.

아벨란제는 1916년생으로 지금은 94세다. 젊었을 때 수영과 수구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에 그런지 노령인데도 수영이 건강법이다. 1936년에는 수영, 1952년에는 수구 선수로 두 번이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의 특징은 영어보다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이나 연설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언론이 공격해도 신경 안 쓰고 무시해 버린다. 그것이 전 세계 신문을 보면서 큰 것, 작은 것 일일이 반응을 하는 사마란치와는 대조적이다.

아벨란제는 1974년 영국의 스탄리 라우스(Stanley Raus)의 뒤를 이어 FIFA 회장이 되었고 그전에 1955년에서 1963년까지 브라질 NOC 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리고 1963년 당시는 한 번 선임되면 종신이었던 IOC 위원이 됐다. 아벨란제는 88서울올림픽에도 참석했다. 당시 FIFA는 지금의 라마다호텔(당시 뉴월드 호텔)에 배정됐는데 그 호텔은 다소 격이 떨어졌다. 그래도 아벨란제는 네비올로(Nebiolo)처럼 불평이나 법석을 떨지 않았다.

IOC
와의 관계는 대체로 협조적이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후로 출전 축구선수 자격문제로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결국은 월드컵에 중점을 두고 23세 이상 3명은 월드컵 참가선수를 올림픽에 참가시키도록 합의를 보았지만 한때 FIFA는 올림픽을 떠난다고 협박까지 했고, 사마란치도 떠나면 할 수 없다고 맞장을 뜨기도 했다. 육상이 빠지면 올림픽에 치명타지만 축구는 안 빠져 주었으면 해도 최악의 경우 견딜만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기본종목으로서 육상, 수영, 체조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FIFA
TV방영권도 형편없었고 올림픽과 달리 주관방송도 없어 ISL 같은 데서 맡아서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스포츠마케팅이 융성해지고 미국에 축구팀이 생기고 미국월드컵이 열리는 등 규모가 커지면서 98년 프랑스월드컵 무렵에는 아벨란제가 축구를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벤트로 성장시켰다. 아벨란제는 IOC 안에서도 초연하게 무게 잡는 사람, 예의 바른 어른이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말을 많이 하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불어로 발언하면 모두 열심히 경청했다.

한국과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은 한국이 뒤늦게 2002 FIFA월드컵 유치에 나서 이미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과 대결할 때였다. 이미 아벨란제는 일본 편으로 알려져 있었고, 일본이 크게 유리하다고 예상된 상황이었다. 반면 유치의 선봉에 선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김영삼 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맹활약,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를 정도로 박빙의 승부가 돼 가고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한국은 유치 비용으로 340억 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다만 부산이 또 1995 OCA 총회에서 결정될 2002년 아시안게임을 전력투구할 때고 YS부산에 내가 해준 것이 없다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필자 입장에서는 둘 다 한국이 따야 되겠는데 아시안게임이 95년에 먼저 결정되고 FIFA월드컵은 그 후에 결정되니 일단 부산 먼저 결정짓고 월드컵은 그 다음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왔다 갔다 하다 둘 다 안 되면 정말 곤란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95년 브라질도 올림픽 유치를 내걸고 그 전주곡으로 리우데자네이루에 IOC총회를 유치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95
년 부다페스트 IOC총회에 가기 위해 취리히(Zurich)에서 1박을 했다. 비행기 연결 사정 때문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서울에서 전화가 와 받아보니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YS) 지금 조깅나가셨는데 40분 후에 전화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40분 후에 걸었더니 YS가 이번 총회 때 사마란치에게 자기 부탁이라 하고 이건희를 꼭 IOC 위원에 등용시키라는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어 부다페스트 총회에 갔더니 마침 그 총회에서는 IOC위원을 하나도 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그 대신 아벨란제와 파디야(Padilha) IOC 위원이 추진하고 있는 리우와 필자가 제안한 서울이 99 IOC총회를 놓고 로비를 벌이게 됐다. 필자는 나름대로 지지세력들을 점검하여 운동을 벌이는데 사마란치가 나를 부르더니 리우에 양보하고 다음해 FIFA월드컵 선정 때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아벨란제가 월드컵을 보장해주고 도와준다고 약속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곤란할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서 그럼 보장도 없으니 양보할 수 없다고 했더니그럼 할 수 없으니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 서울과 리우를 비교해서 리우는 범죄가 많다고 운운했더니 사마란치는당신이 서울에 살아서 그렇지 사실은 리우가 멋있는 도시라고 했다. 또 리우는 올림픽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힘을 보태고 나서는 곳이라 서울이 우선 총회라도 유치해서 로비를 하겠다 하니 사마란치는 입장이 곤란하다 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의 카라로(Carraro) 위원이 와서 서로 타협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필자는우리(서울) 99년에 하고 2001년을 리우에서 하자고 아벨란제에 전하라고 했다. 그런데리우가 99, 서울이 2001년에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 아벨란제의 제안이라고 해 현실성 없이 더 진전이 안 되었다. 그 만큼 아벨란제는 융통성이 없었다.

결국 투표에 들어가 5535로 필자가 이겨 99년 총회는 서울에서 하게 됐다. 리우는 영화까지 만들어 왔는데 필자는 그런 이야기 못 들었다며 형평성을 이유로 영화는 상영하지 않기로 의사진행을 조정했다. 투표가 끝나자 아벨란제는 마이크를 잡고 서울 개최를 축하하고 훌륭한 총회를 치르기를 축원한다 했고, 필자는 감사하다는 말을 역설하고 끝냈다. 승부가 끝나면 도로 친구가 되는 미덕이 스포츠의 특성이다.

1999
년 총회 때 아벨란제는 서울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겼고, 2000년 봄에는 리우에서 IOC집행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드니 남북동시입장을 필자가 제안해 IOC 차원의 지원을 결의했다. 이후 20년이 걸려 리우데자네이루는 룰라 대통령이 앞장서 2016년 올림픽을 따냈고, 앞서 2014 FIFA월드컵도 가져갔다. 아벨란제 평생의 헌신과 노력이 브라질 체육, 아니 좀 더 확대하면 브라질을 오늘날의 위치에 끌어 올린 것이다.

한국도 앞으로 실용주의와 공리에 입각해서 한 번에 한 탕하는 버릇을 버리고 실패해도 성공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1996
년 애틀랜타올림픽 축구 결승도 기억에 남는다. 애틀랜타에서 한 시간 거리의 조지아 대학 미식축구장에서 결승전이 열렸는데 당초 사마란치가 축구 시상을 가고 제1부위원장인 나는 농구경기 시상을 하러 가게 돼 있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메달(로마올림픽 때 안 받은 것) 시상 때문에 갑자기 스케줄이 변경돼 사마란치가 농구장에 가고 필자는 당시 백성일 대한체육회 비서실장( KOC 국제본부장)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조지아대학의 미식축구장 결승전을 지켜봤다. 경기 후 시상 때 우승팀 나이지리아, 2위 아르헨티나 팀에 메달을 일일이 수여했고 아벨란제가 국제연맹 회장으로서 나를 따라 다니면서 꽃을 선수들에게 주었다. 사마란치가 오기로 약속돼 있다가 내가 와서 기분이 나쁜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영접도 없고, 나는 적당히 기다리다 시상만 했는데 나도 기분이 안 좋아서 최고 스피드로 시상을 했더니, 아벨란제가 “Not too fast(너무 빨리 하지 말아)”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어쨌든 필자는 인사도 악수도 없이 다시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아벨란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올림픽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제로(Zero)에 가까웠던 TV방영권 수입도 수십 억 달러에 이르게 해 놓고 은퇴했다. 1999년 서울 IOC총회 때는 서울이 이미 월드컵축구도 딴 상태였고, 2002부산아시안게임도 앞두고 있었다. IOC총회 유치는 리우가 서울에 패했지만 이미 당시 브라질은 올림픽을 향해 착착 준비 중이었다.

봄에 있었던 로잔에서의 임시총회 기간에 파운드(Pound) 위원과 필자가 일촉즉발까지 격돌한 것을 알고 아벨란제는 파운드와 필자, 젠리앙 헤 누즈만 위원의 미팅을 주선해 화해시키고 여러 사람에게 2001년 위원장 선거에 나를 밀어야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실제 2001년 선거 때는 아벨란제가 벨기에 혈통이 좀 섞여 있었다는 이유로 로게(Rogge)를 후원했다.

마지막 서신이 온 것은 필자의 2008년 특별사면 복권소식을 듣고축하한다. 이제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원상회복이 되어 기쁘다는 말이었다. 비록 1999 IOC총회 유치, 2002년 월드컵축구 때문에 국가이익을 놓고 격돌은 했지만 아벨란제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스포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

축구왕국을 일으키고, 브라질 NOC 위원장에서 IOC 위원으로 가는 여정에 2014년 월드컵, 2016년 남미 최초의 올림픽을 브라질이 개최하도록 이끌었다. 룰라 대통령 말대로 아벨란제는 브라질이 G20 시대에 들어가게 한 세계스포츠계의 거인인 것이다.

IOC 수석부위원장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