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3. 3. 5. 17:08

[사도행전(Acts)성령(聖靈/Holy Spirit)시리즈 설교 말씀 총정리 및 小考]

 

2019년에 시작된 사도행전 우리들교회 주일설교말씀이 햇수로 장장 5년에 걸쳐 선포되었으며 그 동안 사도바울의 피눈물 나는 전도 여행과 주님사명감당의 고난과 보람찬 전도사역을 말씀을 통해 생생히 듣고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최초의 전도자이며 열렬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AD 35년 30대 초반 다메섹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바꾸어(회심: 사도행전 9장) 생애를 전도에 힘쓰고 각지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63세쯤 순교하였으며, (1)<데살로니가전후서/고린도에서 기록>, (2)<고린도전후서/에베소에서 기록>, (3)<로마서>, (4)<갈라디아서>, (5)<에베소서>, (6)<빌립보서>, (7)<골로새서>, (8)<빌레몬서>, (9)<디모데후서>, (10) <디고서>, (11)<히브리서> 등을 모두 썼는데 사도행전은 바울의 전도여행을 총망라한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이지만 누가(Luke)가 썼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신상 명세 입니다.

 

(1) 유대인입니다

(2) 길리기아(Cilicia) 다소(Tarsus: 교육도시)출신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입니다

(3)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성장함으로 유대인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가말리엘(Gamaliel)문하에서 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5) 산헤드린(Sanhedrin)공회 회원입니다

(6)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고 믿음 생활의 금과옥조로 삼는 성경구절은 첫번째로 (1)데살로니가 전서(1 Thessalonians:  5장 16절~18절 말씀으로 “16 항상 기뻐하라 / Rejoice evermore.// Soyez toujours joyeux.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Pray without ceasing/ Priez sans cesse.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In everything give thank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concerning you// Rendez grâces en toutes choses, car c'est à votre égard la volonté de Dieu en Jésus-Christ.)입니다. 두 번째는 (2)마태복음 7장(Matthew 7: 7~8) 7절~8절 말씀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it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and to the one who knocks it will be opened)입니다. 세번 째로 특히 제가 주님을 영접하게 해준 결정적인 말씀으로 (3)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Pride goeth before destruction, and an haughty spirit before a fall.)였습니다.

 

 

2023년 1월15일 주일예배말씀주제는 사도행전(28:28~31)마지막 구절로 피날레에 해당하는 구절이며 ‘성령의 우리들 행전’이란 제목 설교로 마무리 되었는데 “1) 그런즉 차별이 없어야 한다, 2) 여전한 방식으로,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여야 한다, 3) 거침 없이 입니다”의 세가지 소제목으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가말리엘(Gamaliel) 문하의 수제자로서 산헤드린(Sanhedrin)공회 출신인 사도바울은 스테반(Stephen)의 순교로 죄책감과 큰 깨우침을 받고 평생 주님께 헌신한 기독교신앙의 최고봉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주일설교말씀 중 “자기 죄를 보는 사람만이 담대하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와 “말씀 끝에는 돈과 음란과 이권이 있어서 우리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것이다”란 말씀에 찔림이 걸어 들어옵니다.

 

십자가와 지혜와 타이밍은 원칙에 근거하며 깨닫는 것이 고침의 시작이라고 하십니다.  나의 정체성이 죄 성이므로 내가 죄인인 것을 보아야하며 성경이 안 깨달아 지는 것 자체가 심판이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고 하십니다. 사건이 오면 감정부터 만나게 되는 것이 우리인데 이해가 안되니 실망, 욕심, 시기, 질투, 비교, 불평 불만, 미움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으로 인간은 각자 악에 대해 우둔한 고집과 아집이 있는데 각자 내 입술이 부정한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음란이 성령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며 성령 말씀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침 받는 비결은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입니다. 잠 자는 체하는 사람은 결코 잠을 깨울 수가 없는 것이며 우리가 눈을 감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므로 고침 받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고 회개는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아야 하는데 믿는 사람 중 고난을 받은 사람이 많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난이야기를 하면 성도가 반으로 줄고 죄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고난의 종류가 가난과 질병에서 배우자고난과 자녀고난으로 바뀌었지만 택자들에게는 마음이 가난해지는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이라는 함정’(trap of self-confidence)에 빠지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부정(self-denial)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기부정지수가 99%도 불합격인 것이며 오직 100% 자기부정이 되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며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예수님을 권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안에 있어도, 100%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있어도 오직 하나님나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심판의 Climax는 십자가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오직 성령의 이야기로 승화시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작과 마지막이 모두 구속사(the History of Redemption)입니다. 바울은 연약 함에 매여 있으므로 무식하고 용약한 사람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이 성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구속사인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아야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어 나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인 것입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지만 미워해야 할 죄는 공의로 떨궈내야 합니다. 목적이 구원 이어야 진정한 동정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존재자체가 가해자인 것인데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성령의 피난처이며 우리가 없는 곳이 유라굴로(a northeaster)라는 광풍(a wind of typhoon)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면 따뜻한 말이 나오는 것이며 따뜻한 대접을 하면 주님 영접이 쉬워집니다. 행위로는 누구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을 믿으면 비로서 천국에 간다 고 하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주님께 맡기고 생명을 내 놓고 기도하게 되면 피난처인 곳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을 길로 놓고 가는 것은, 이타적인 척하며 이기적인 길로 가려고 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다림의 결론은 예배인데 위인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충돌하여 깨지는 것이 성령의 구조이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깨뜨리셨습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저주는 안 깨어지는 것들인 가치관과 미모와 지위 등인데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깨어질 때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부활을 믿어야 깨어지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는 지혜이며 타이밍인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는 허무와 기쁨의 양 날개에 대하여 교훈이 되는 주옥과 같은 진리가 펼쳐집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전도여정에서 길이 좁고 천신만고 끝에 느리게, 더디게, 간신히, 겨우 목적지에 도달하여 마치 완행선 열차에서 내리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내가 만난 성령님을 간증할 수 있어야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어서 약함과 죄의 고백을 간증하는 13개의 서신을 써 내려갔습니다.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어낼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시는 데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라는 구속사가 깨달아 지지 않으면 고통을 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지겨운 괴롭힘 그 자체인데 하나님을 모르면서 자기 문제에만 매달리니 괴롭힘을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성령의 위엄을 주시는데 세상의 위엄이 허상 임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 함은 있어도 위엄을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죄악이며 죽어가는 목장공동체의 목원(이웃)을 책임질 때 위엄이 주어집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서 받는 호의(학벌, 돈, 지위)는 나를 죽이는 호의이며 하나님이 없으면 죽이는 호의가 되는 것이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호의를 보여야 하나님의 호의가 은혜가 됩니다. 주님의 호의가 은혜이며 내 죄를 고하고 하나님께 호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잘해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묶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호의이며 용서입니다. 즉 성령의 호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자유 함이 없으면 편함도 갇힘도 못 누리는 것인데 갇힘에도 복음을 전하는 환경이 자유 함이며 복음(Gospel/Good News)을 전하는 자유가 최고의 자유 함입니다.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가 옵니다. 미움의 감옥 시샘의 감옥, 인정의 감옥, 절망의 감옥, 의심의 감옥에서 예수님만이 자유입니다.

 

육체의 기근보다 영적 기근이 들면 허무의 잡초가 무성하여 자기 정체성을 망각함으로 자기 열심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편에 욕심과 열심 그리고 또 한편에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야훼 이레’(Yahweh-jireh/Jehovah-jireh)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Lord will provide)입니다.

 

말씀의 깨달음의 황홀경이 믿음의 최고의 경지이며 기록된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인데 성령의 주시는 말씀은 Voice로 듣는 것으로 황홀의 결론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성령 황홀의 목적이며 영성 지수입니다. 세상 황홀의 목적은 안주(安住/peaceful living)이지만 성령 황홀의 목적은 보내심, 즉 파송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가 당하는 고난보다 큰 것입니다. 자가 義는 내 안에서 빼내야 하는 마지막 우상입니다. “내 죄를 보는 것은 신세계를 보는 것이며, 내 죄를 보는 것은 신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현재 고난이 내 삶의 결론인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배움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성령이 들어와야 차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거꾸로 하는 것이 믿음이고 또 자기 죄를 보는 것도 믿음입니다. 억울할 때 부인하고 분노하면 오해가 풀리지 않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생색내는 열심과 눈치 보는 열심은 自信敎의 열성 신도이니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타심 입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니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고 자기 죄가 안 보이니까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해자 였음을 깨달았을 때 피해의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분노를 먹고 사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100% 악하고 음란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환경이 어떤 결말을 당해도 내가 죄인임을 알고 결박 당하면 천국에 가는 지름길입니다.

 

장차 받을 환란이 복음이므로 기복이 아니라 팔복의 길을 물어야 하며 인생은 한계를 느끼는 것이 축복입니다. 아픔과 수치가 넘치니 예수님 만나는 것이 감사한 것이며 주 안에서 자존 감이 세워지니 손이 가고 발이 가고 지경이 넓혀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차별없이 세워지는 리더십이 되어야 하는데 국가도 인종도, 혈연도, 지연도 넘어선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주를 섬겨 자발적으로 금식하면 구별이 되는 것인데 Service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사람을 섬기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육적인 욕망의 결박이 풀어지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쉬워지게 되며 거룩한 기도와 금식으로 섬기니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선교의 기획자이시며 큐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비결인데 섬기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입니다.

 

헬라어인 Apostle은 원래 ‘파송하다’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사도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자이며, 전도자이며 교사이며 선교사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자산은 건물이나 재산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우리들교회 땅끝 선교지는 가정이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막아내는 것도 땅끝 선교입니다. 은혜 아니면 나서지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 옥에 갇혀 사는데 옥중 광채인 말씀으로 찾아 오시며 금식이 1년간의 기도와 맞먹는 것인데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쓰임 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교회를 아무리 나와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제일 큰 마귀가 있으니 탐욕, 시기, 질투. 미움, 음란의 귀신이며 환경이 겸손한 것이 겸손한 것으로 우리는 작은 자가 되기 어려운 것이데 모두 큰 자가 되려고 하니 힘든 인생인 것인데 금식 3일이 1년 기도보다 위력이 있다고 합니다.

 

성령의 동행은 성령의 구속사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며 말씀이 빛과 소금이 되어 천국을 전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교리가 아니라 진리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데 성령이 임해야 분별이 가능하며 우리에게 온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예수님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애굽 400년, 광야 40년 가나안 정목 전쟁 10년 등 450년 동안을 구속사는 오늘 하루 하루를 잘 살면 만사가 형통한 것으로 세상에서 최고의 복은 하나님과 가깝고 친한 것으로 성령의 구속사가 깨달아 져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니 예배는 드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며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으며 도적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성은 구원의 확신에 있으며 성경은 오직 오실 예수님과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선지자들은 말씀을 정치하는 방향으로 듣는 것이며 만일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교리만 보고 진리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음성으로만 들으니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스테반을 죽이게 되는 것처럼 진영 논리가 종교가 되어 편가름으로 서로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 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말씀이 약이 되어 우리를 살리 시는데 만일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말씀 따라 순종하니 말씀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이며 구원 따라 살아야 하는데 행복을 위해 사니 파탄이 나게 되고 거룩을 목적으로 놓으면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니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인 것이고. 십자가는 plus이며 합쳐 짐 입니다.  

 

흉년이 오지 않은 사람은 육이 무너지지 않으니 부활에 대하여 얄팍하게 다가오는 것이므로 육이 무너져야 영의 세계가 세워지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어 시공을 뚫고 그 방에 들어 가셨는데 제자들에게 옆구리 창에 찔렸던 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평강을 보여 주셨습니다. 40일 간 여러 번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 평강을 누리며 다른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증거하시며 평강을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부활 하심은 구속사 약속이며 좋은 소식으로 복음입니다. 약속 말씀에 근거하여 전파하는 것이 일으키심이지만 부활만 또는 십자가만 강조하여 치우치게 되면 이단인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는 날마다 언제나 오늘로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땅은 예수님이 없다면 모두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순종하면 이 세상에서 거대하게 보이는 것에 하나님이 웃지만 그것은 실제로 비웃는 것으로 내게 주신 고난으로 애통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울이 불쌍한 삶을 살지만 권세자인 사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주적 사명을 주셨기에 어떤 조롱에도 부활의 하나님이 내게 임하시기에 속으로 부러워하지 말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메시아 예수님-하나님의 웃음을 웃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100년 전에 다윗이 미리 보았는데 다윗은 1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썩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베드로나 다윗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약속과 부활을 미리 본다면 그것이 믿음이고 내 속의 예수를 살리시고 일으키신다. 예수님 부활 모습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영으로 부활을 주님을 보았기에 성령의 일으키심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성령이 임하지 않고 부활의 영이 임하지 않으니 복음전파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미리 보지 못하니 육신이 썩어 짐을 당하는 것이며 부활의 주님을 못 보니 썩어 짐을 보며 사는 것으로 하나님이 날 살리셨다고 간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최고의 설교는 바울의 설교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설교인데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지루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죽지 않고 환경이 바꾸길 바라니까 두렵고 평강이 없는 것으로 십자가를 거쳤기에 부활이 오는 것인데 하박국의 주제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이며 부활을 경험하면 썩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고 우상이면 따라 죽어야 하는 것이어서 평생 미워하다가 죽으니 따라 죽는 것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육의 죄와 예수 믿지 않는 영의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낳아 주셨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썩어 짐을 당하지 않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어 죄 명부를 다 없애 주시고 의롭다 하십니다.

 

복음은 죄사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은혜 가운데 머무는 것이라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있어야 서로의 관계가 유지되고 때마다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것이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가는 길에 진리의 성령이 임하니까 삶의 어떤 사건이 와도 성숙하게 반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면 세상 일보다 하나님의 언어가 고파지게 되어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나라의 ‘가 나 다 라’를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고 진정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불의함이기에 의롭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며 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곧 불의한 것으로 육이 무너져야 비로서 영이 세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기란 같은 부류에서 자기와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의해 느껴지는 마음인데, 이해가 되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이해가 되는 것으로 교양이 있으면 시기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 없이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인데 살기등등하게 교회를 잔멸한 바울도 비방하는 것인데 이생의 삶을 살면서 영생의 삶을 논하니 영생의 복음 전하는 사람을 훼방하는 것으로 영생의 삶에 합당치 않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처럼 성경은 나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며 ‘시기, 반박, 핍박’ 3총사를 보며 ‘복음은 장차 받을 환난이로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잘 살아지면 잘난 척이 나오는 법인데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복음이 확장되어 한국에도 왔는데 잘 살게 되니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다 죄인인데 고백하는 사람과 고백하지 않는 부류만 있을 뿐이며 우리 집안의 이방인이 가장 무서운 이방인이므로 땅끝 선교지가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믿음이 단 1이라도 있는 사람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이 영생으로 가는 적용이며 성령의 반응이므로 매 삶을 죄로 보고 회개 적용하는 것이 말씀이 퍼지는 역사인 것이고 내 때문에 주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성영의 반응입니다.

 

이 땅은 불의한 세상이기에 육이 무너져야 영이 살아납니다. 허튼소리에 귀가 솔깃하는 사람을 사탄이 좋아하는 법이며 공동체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며 어려울 때 무너져 내리는 ‘껍데기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말씀 듣고 기뻐하는 성령 충만한 일 대신 나의 일이 보이기 시작하면 낙심이 물밀듯이 몰려오는 것이므로 고난 가운데 십자가를 길로 놓고 살아갈 때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때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의 진리이며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고 의로움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멸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인데 큐티일기가 개인예배로서 반복 훈련이 최고의 교육이며 반복하는 일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이고 큐티와 목장공동체가 노아의 방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같은 행위라도 똑 같은 일상의 패턴이 지루해 보여도 가장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좋아 보여도 기쁜 일이 반복되어도 나중에 황폐하고 허무한 것이 인생입니다. 알파 되신 하나님과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끝내시지 않으면 끝낼 자가 없으므로 가치관에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참지 못하는 것이 이 땅의 특징인데 카이로스가 오기까지 주어진 자리 지키며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며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입니다.

 

비비고 닦고 문지르며 살아야 하는데 어떤 환경에서도 비비고 닳도록 사는 것이 여전한 방식으로 최고의 기사가 되어 증거와 증언과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길로 놓고, 장차 받을 환난인 복음을 길로 놓고 가면 주님이 참된 화평을 주십니다. 시기, 반박, 비방을 넘어 사도 바울을 돌로 치며 추방까지 하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여전한 방식의 말씀 묵상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가장 올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괴로운 것은 앉으나 서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인데 복음을 붙잡고 가면 끝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으며 쾌락을 좋으니 영적 기쁨이 없고 그래서 앉으나 서나 ‘오병이어’만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동적으로 즉각적으로 기복적인데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는 늘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고 하나님 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정 받으면 교만해지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우상 삼으면 (1)쓸 데 없고, (2)무가치하고 (3) 헛되고 (4)망령된 것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자기를 주목하게 하는 자기숭배라면 자기 숭배를 못하게 하는 것을 인생의 주제로 삼아야 성령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죄를 오픈 하는 것으로 주님을 만나서 깨닫지 못하면 모두 인정 받고자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전적 죄인 임을 고백하면서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밖에는 일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간증해야 합니다. 목장이란 구원공동체가 없으면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물의 논리는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통하여 구원을 위해서만 구원의 눈물 흘림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인데 성령의 의논은 승리가 아니라 진리가 그 목적입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고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바리새인처럼 인생의 답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 깨끗치 않으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금식만 하고 할례만 하면서 내 안의 종교적열심과 회개하지 않는 열심을 부적처럼 여기고 있으니 성경을 외우지만 평강이 안 오고 만사형통만 바라는 3천배(불교)를 하며 거짓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는 것인데 말씀 해석이 없는 열심이 무서운 것입니다. 전적 무능, 전적 부패라는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고난을 통과하며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가 너무 좋아 보이지만 진짜 표적은 십자가 입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구원을 위해 자랑 질을 하지 않아야 하며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눈 높이를 맞추는 것이고 성령의 돌보심이며 구원의 목적이므로 앞으로 밑지지만 뒤로 남는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구속사는 무능하고 부패한 것인 이유는 사람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며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하지 않는 나의 열심은 이단인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은 인내이며 성령의 사람은 듣는 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얻고 구원으로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도 복음 위에 놓으면 장벽이 되는 것이며 복음이 아닌 것으로 속박하고 내 삶이 안 따라주면 지속적, 반복적, 습관적으로 괴로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선지자였던 능수능란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니골라당은 ‘영혼만 귀하고 육체는 약하니 마음껏 행음하라’ 고 하는 것인데 올무를 놓은 것도 올무에 걸려 넘어가는 것도 모두 죄입니다. 돈 가지고 짓는 죄가 음행인데 앞으로 남고 뒤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임을 그때는 모르나 지금은 알리라. 또 지금은 모르나 나중엔 알리라.

 

 

멀리해야 할 4가지 모압의 교훈은 (1)우상숭배 (2)음행 (3)목매어 죽인 것으로 지내는 제사 (4) 피(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에 속함)인데 예수가 없으면 필요한 게 그렇게 많은 것이며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피/대속의 죽음)이므로 통과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십자가 죄사함과 부활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낙태도 살인이고 정죄와 미움과 살기도 살인입니다.

 

 

행복은 인격이 없는 이기적인 것에서는 올 수 없으며 목장공동체에서 이타적인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각자 안식의 분량이 다르기에 자유함을 먼저 주어야 하며 하나님의 상급은 삶 자체를 잘 사는 것이며 옳게 행하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형제의식-배려=사과-권면-공감은 구원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디아트리보’는 사명의 자리로 반짝반짝 닦고 문지르고 수고하는 삶이며 사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결정이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결정이 망하게 하는 결정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니 불평, 불만, 원망, 시기, 질투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거치지 않으니 결정적일 때 분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열정과 무서운 열심은 다른 것으로 구원의 관점에서 분별하여야 하는데 구원의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악한 것입니다. 구속사는 1+1=2가 아니고 영적인 것이라 깨닫기 힘든 것입니다.

 

혼혈아이며 믿음으로 섭외된 디모데(Timothy)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뜻인데 그는 본질을 위해 비 본질을 양보하였으며 부르심에 순종한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13통의 서한 중 2통이 디모데 전서와 후서에 나옵니다. 순종하고 가면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목적이면 놀라서 물러갔던 돈도 돌아올 수 있으며 지금은 흥하나 예수가 없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자가 이방인이며 말씀이 들리면 사명을 위해 갇힌 감옥의 고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역할이 아니고 능력위주로 하게 되면지옥이고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마음에 매듭이 있으면 방언이 안 터집니다. 말씀 회복과 가정 회복이 우리들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비전이 아니며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의 꿈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독려-격려-권장-권고-권면으로 한 영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깨닫는다는 것은 천지가 놀랄 일이 많게 되는 것이며 자기 죄를 보는 것이 죽은 자를 세우는 것 보다 소중합니다.

 

사명 감당을 위해 성3위일체 하나님이 총출동하시어 순풍으로 직행하게 하시지만 초신자에게는 십자가의 직행은 쓰이지 않으며 사명의 돛을 달아야 순풍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쾌락과 행복의 항구처럼 매력적인 곳은 지나쳐야 합니다. 구원을 생각해야 지혜가 생각나게 되며 그 사람의 문화를 헤아려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겪은 자만이 아픔과 슬픔을 알 수 있으며 고난에는 장벽이 없어서 십자가의 아픔을 알고 전할 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말씀이 들리니 마음이 열리고 따르게 되며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시간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며 주의 일을 위한 만남은 반드시 만남의 순풍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좋은 죄인과 나쁜 죄인이 없이 모두 죄인이기에 구원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며 구원을 위해 적용하니까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고 구원이 약이므로 미워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돈 귀신, 음란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영적으로 귀신 들린 사람들인데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유혹들이 넘쳐나는 것이니 괴로움을 인내하며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니 예수님께 초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누구가 귀신들려 보이는 것이며 예수 안 믿으면 우리 모두 귀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전문가들 보고 ‘귀신 같이 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의 고통보다 우선인 것이 나의 유익인데 돈과 하나님과 겨루다 이겨서 내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구원이 되니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나눌 수 있는 지체가 있으며 견디며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나누니 더 이상 감옥이 안되는 것이며 입술의 기도가 되니 찬송이 나오는 것이고 응답해주는 지체가 있기에 기도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은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요?.

 

자기 죄를 보는 대화와 찬송이 최고의 대화이고 찬송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도매금으로 전도하니 찬송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직면하면서 주님을 찬송하면 기쁨이 충만하여 어떤 감옥도 감옥이 되지 않는 것이며 구속사를 모르면 인생이 해석이 안되어서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축복이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예수님만이 해결책인데 고난의 한 방중에 들려지는 찬송이 성령의 찬송입니다.

 

생활 속에서 지진 같은 사건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죄가 우리의 근본 문제인 바 지닌 같은 사건이 우리 죄를 흔들어 죄악을 깨닫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어 회개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을 읽고 지나가야 죄로 막힌 내 인생을 열어주는 성령의 열림으로 하나님이 갑자기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옥 속에 갇힌 것이 내 삶의 결론이라고 하니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자유함이 생기는 그 곳은 더 이상 옥이 아닌 것입니다. 열린 마음의 반대는 닫힌 마음이 아니라 꼬인 마음인데 세상과 다른 마음이 믿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유를 부르짖다가 자유를 반납한 바울은 삶의 소망이 없는 간수와 같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전도하는데 차별이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인데 그래서 십자가는 타이밍이고 지혜인 것입니다.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이 갇히는 자세이며 빌립보(Philippi/ Little Rome) 감옥이 간수 한 사람 한 영혼에 집중 하였기에 온 유럽이 열린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가 인생 최고의 질문이며 답인데 자신의 죄인 외도를 고백하는 구원의 이야기가 구속사입니다. 나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어 대속하신 것이 구속사이며, 또한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갇힘으로 내 자유를 포기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옥 터가 열리고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리니 ‘주 예수를 믿으라!’인 것입니다. 영혼의 상처가 씻김을 받고 성령의 교제가 있는 곳이 교회공동체가 되는 것으로 말씀을 전하는 거시 본분이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전할 것은 오직 주의 말씀(복음)입니다.

 

나는 간 곳이 없고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으로 세상에서 크게 기뻐할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입니다. 가장 큰 섬김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 이시며 사람은 사랑을 만들 수도 줄 수도 없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존재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입니다. 당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 살리는 약재료도 풍성한 것입니다. 죄 패는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는 호패인데 평생 지고 갈 죄 패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라고 지니고 다니는 호패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유대인의 왕이란 죄 패를 붙이고 골고다로 가시어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내 죄를 보면 내 인생에 ‘날이 새매’가 되는데 그 밤이 지나고 시기 시기마다 ‘날이 새매’가 오는데 예수를 만나 덤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특권은 구원을 위해 쓰고 구원을 위해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인데 특권을 감추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한 생명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구원을 위해 특권을 내려 놓을 때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처음에 내 죄를 (1)부정하다가 (2)분노로 변하고 (3)우울에 빠진 후 (4) (환경과)타협하고 (5((급기야)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이 땅의 특권을 내려 놓을 때 하나님이 높이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세상에 잃을 것이 많을수록 상관에 대한 두려움이 많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무서운 열심이라고 합니다.

 

‘파라클레이토스’는 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하며 묶여 있는 것으로 모든 환경에서 놓임 받는 비결로 말씀의 권면으로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빌립보가 말씀의 칼끝이 되어 유럽 전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구원 때문에 꿇어 엎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는 것으로 죄패가 호패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잘 붙어있어야 성령의 놓임을 경험하는 샬롬으로 적용이 믿음과 회개의 결론입니다. 기도하는 존재가 성도이며 만인이 기도하는 곳이 성전으로 하늘은 먼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을 뜻합니다. 공손함이 허물을 덮으며 감정에 놀아나는 것이 교만함입니다.

 

100%죄인인 나와 100% 옳으신 하나님의 만남이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기쁨인데 말씀이 들리는 것과 들려서 순종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재가 죄인임을 알고 성령의 놓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 덕분에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죄를 깨달은 만큼 주님의 속량의 분량이 되는 것이며 회개를 경험한 만큼 은혜로 가는 것인데(회개는 은혜로 가는 길) 회개를 할수록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예수님 때문에 기쁘게 됩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돌아보며 욕심과 교만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실 예수님 이야기가 구약 39권이고 오신 예수님 이야기가 신양 27권으로 하나님의 전략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제1조전은 당장이 아니라 먼데(장차)를 보는 것인데 ‘깨어있다’는 것은 사건을 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려고 마음만 먹어도 하늘에서 사자가 도와주십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며 말씀과 공동체가 전략이고 습관대로 자기관레대로가 전략입니다. 시기-질투-경쟁심의 뿌리는 똑 같은 것인데 내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면 시기에는 소동이 따릅니다.

 

주님의 구속사의 강론을 통하여 화평의 복음과 샬롬의 복음을 정하십니다. 구원은 선물이기에 5달란트 받은 사람은 10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하여 심간이 불편할 뿐이므로 부러워 말지어다.

 

행위구원이란 기도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성령의 강론이므로 성령의 강론은 한 가정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로 비비고 닦고 문지르면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으로 맞춰지므로 비비고-닦고-문지르며-광내면서 주님과 완주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신사는 너그러움이며 고정관념을 내려 놓는 것이며 간절함으로 ‘코이노니아’와 ‘디아트리보’입니다. 배 밑창에서 노 젓는 것이 ‘휘파레타스’인데 하나님의 매를 맞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격분은 영혼을 향한 애타는 관심으로, 애통하는 사랑으로 세상의 정신 앞에 격분하고 범사에 기복적으로 종교심이 많음을 알고 격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한 단어입니다. ‘오늘도 무사히’를 표어로 무사안일주의가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이며 거룩과 경건한 정신을 강조하며 군계일학 형 영지주의가 스토아학파 철학(제논이 창립자)은 단편적인 지식을 모아서 거리의 철학자 또는 말쟁이의 철학인데 복음은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오래 되어도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미인과는 3년 행복하고 맛있는 요리도 얼마 못 가지만 예수 믿고 가는 인생은 평생, 영생 행복한 것입니다.

 

각자의 중독과 우상이 다를 뿐이어서 고난이 축복인 것입니다. 기복적이라는 것은 범사에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 입어 살아가는 존재란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를 뜻하는데 말씀이 임하여 내가 죄인 임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과 부활이 증거인데 믿을 만한 증거가 믿음이며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성령의 알리심 입니다.

 

하나님은 육적 흉년, 정신적 흉년(인간 관계), 영적 흉년, 질병의 흉년을 골고루 섞어서 아버지 집으로 오게 하십니다. 고린도는 음란을 뜻하는데 음란의 끝이 동성애입니다. 출신보다 더 절박한 것이 고난이며 고난으로 하나가 되는 것인데 같은 고난을 겪는 지체들이 많아 함께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구속사가 나의 구속사가 되는 것이 성령의 권면입니다. 내 죄가 보인 만큼 눈물이 보이고 하나님께로 나아 갑니다. 말씀 듣는 구조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완악함과 고집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에 붙잡혀 있으면 죄짓는 것과 멀어지 게 되는 것이며 말씀에 붙잡힐 수 있는 구조가 공동체이며 공동체에 안 오는 것이 죄로 향하고 있는 징표인데 죄를 나누면 죄가 힘을 잃게 되고 죄가 많을수록 은혜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택자에게는 심판의 때가 구원의 때이며 환난과 고난의 때이며 주의 이름을 부를 때인데 그 때 구원의 날이 임합니다.

 

피와 불과 연기 속에 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의 날이 입합니다. 인생의 한계와 말세를 느낄 때 상명과 소망의 이름이 주님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는 것이며 찾아갈 공동체나 동료가 없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합리화를 내세우는 내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기복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분노하면서 허사를 경영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내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거룩하게 빚으시려고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물질의십자가, 권리의 십자가, 질병의 십자가라는 고통의 사간을 통해 하나님, 권능자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게 됨을 알고 영생을 받음을 신뢰하니 응답 받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통해 가정의 부활을 비춰 주시는 것이며 호피의 기도가 아니라 직면하는 기도로 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성령충만인데 내가 번하는 것이 구원의역사의 시작으로 욕심 충만의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며 응답 받는 기도는 성령 충만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인 것인데 내가 문제인 것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죄인임을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됩니다.

 

도덕의 유치원 시대(kindergarten Era of Morality)에 살고 있어서 죄의 심각성에 둔감한 것입니다.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이 이 시대의 순교이며 예수님께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의외의 도움으로 문제를 풀리게 하시는데 예수님을 주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기복과 인과 관계를 합리적이라고 하는데 세상이 승리하는 것이 율법의 길인 것인데 율법에 깨어 있으면 옳고 그름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성령은 믿을 때 받게 되지만 조건은 아니며 믿을 때 성령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질문하는 것이며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것과 구속사가 읽혀지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세례의 표적은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방언은 말씀으로 말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12는 회복의 숫자로 천국 문도 12개, 12개 보석, 12 천사, 12열매로 온전한 회복공동체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습관이 되면 나중에 큰 세력이 되므로 날마다 큐티, 날마다 기도, 날마다 예배, 날마다 목장이 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아닌 것에 전심전력하면 결국 종 노릇하게 됩니다. 이 세상 각 세력은 힘의 대결인데 말씀에 힘이 있어 세력을 얻어가는 것이며 성령의 세력은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 패 명함으로 걱정주식회사-교만주식회사-인정 중독 주식회사-이기적 주식회사 CEO 겸 ‘디아코노스’ (집사)가 바로 내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내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내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내 능력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입으로 고백하지만 마음으로 고백하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음속 죄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 큐티이며 큐티가 욕심을 가지 치게 합니다. 살기 좋으면 타락해 지는 법인데 포장 전략이 세상 경영의 특기이며 오징어게임처럼 공감이 인기의 비결인데 세상은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며 이 땅은 인정과 돈이 좋은 것입니다.

 

소동과 요란과 분란과 소요는 세상의 말을 들은 결과로 모든 것이 분노와 요란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무시하는 것 하나로 소동을 일으키고 체면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이므로 말씀 듣는 지체들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세상 소동에 떠내려가지 않는 비결입니다.

 

모든 길 끝에 돈이 있기에 부들부들 떠는 것인데 무시 받고 체면 상하는 것이 분노의 이유이며 인정 받게 되면 모든 소동이 잠재워지는 것으로 내가 날마다 죽어지는 것이 소동을 막는 비결이며 내가 죽기 싫어서 내 속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내가 죽어지는 것이 소동 속에서 생명 탄생의 비결로서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할 수 있기에 내가 죽어지는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죽어지면 싸움과 소동이 끝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지고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하는 것인데 내가 돈을 좋아하니 소동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인들만 모이니 소동이 일어나는 법이며 죄의 파동으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인데 말씀이 들리면 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고 말씀이 해석이 되어야 소동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파라칼레오는’ 옆에 불러 놓고 외치다, 부르짖다 위로하다라는 뜻인데 ‘파라칼레토스’는 성령님을 지칭하며 고난과 역경은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통과하는 것으로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불평 불만하는 사람 옆에는 군중은 있으니 지혜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 품에 안기어 위로 받아 해석되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입니다.

 

‘디아코니아’는 말씀 순종과 섬김이란 뜻인데 극복은 내가 하는 것이고 통과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성경에 극복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모든 것이 그때부터 사명이며 사명이 시작되어 기적이 일어나므로 십자가는 지혜이고 지혜는 타이밍인 것입니다. 큐티는 말씀 묵상을 통하여 인간적인 내 생각을 죽이는 것으로 오늘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과 ‘가정중수’가 우리들교회 정체성이며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적용의 결론은 영혼구원인데 성경의 비밀은 그 인봉을 아무도 풀 수 없으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마지막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방이 하나님의 돌보심이며 ‘마지막처럼’ ‘불꽃처럼’ ‘칼끝 물방울처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전세계교회의 주춧돌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큐티복음처럼 사는 것이 마지막처럼 사는 것입니다. 환경에 장사가 없다는 말은 겸손한 사람은 없고 환경이 겸손한 것입니다. 믿음은 분별이며 전도가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인 데 자기 죄를 보는 것이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 결박을 잘 당해야 하며 환경에 잘 묶여 가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최고의 준비이고 성령의 각오입니다. 툭 치면 나오는 것이 내 믿음의 현주소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 정체성의 본질인 것입니다. 믿음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 형입니다. 나는 간 곳이 없고 예수님만 보여야 하는 것인데 무용담과 자랑질과 생색은 간증과 나눔이 변질된 것으로 구원은 생색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론이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생명 낳는 열심보다 눈치 보는 열심은 자신교의 열성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심 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타 성인데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니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고 자기 죄가 안 보이니까 회개가 안 되는 것인데 내가 가해자 였음을 깨달을 때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인간은 100% 악하고 음란하고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분노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환경이 어떤 결박을 당해도 내가 죄인임을 알고 결박 딩하면 천국 가는 지름길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거꾸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억울할 때 분노하면 오해가 풀리지 않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유대인이며 (2)길리기아 교육도시 다소 출신 diaspora로 (3)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성장했음으로 유대인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있고 (4)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훈련을 받았으며 (5) 산헤드린 공회 회원으로 (6)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습니다. 내 죄를 보는 것은 신세계를 보는 것으로 신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자기 의(義)는 내 안에서 빼내야 할 마지막 우상입니다. 구원의 창시자는 예수그리스도인데 현재 내 고난이 내 삶의 결론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배움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므로 성령이 들어와야 차별이 없어 지는 것입니다.

 

말씀 깨달음의 황홀함은 기록된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목소리로 듣는 것인데 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며 황홀이 결론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방인에기도 보내시고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 황홀의 목적이며 영성 지수입니다. 세상 황홀이 목적은 안주인 반면 성령 황홀의 목적은 보내심, 즉 파송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이밍을 놓치게 되며 사명을 빙자하여 자기욕심을 내미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임을 아는 권세가 천국의 권세이며 자유하게하는 권세입니다. 성령의 황홀함을 모르면 각자의 황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없으면 받는 호의(학벌, 돈, 출세)는 나를 죽이는 호의입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고하고 호의를 구해야 합니다. ‘아폴로 게오마이’는 변명하다,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다라는 듯인데 나를 묶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호의이며 용서입니다.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시는데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는 구속사가 깨달아 지지 않아서 괴로움이 지겨운 것입니다. 인생이 지겨운 괴롭힘인데 하나님을 모르고 나에 대하여도 모르면서 자기 문제만 보이니까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함은 있어도 위엄은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죄악인데 죽어가는 목원을 책임질 때 위엄이 주어지는 것이며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어낼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도바울은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풀어서 약함과 죄의 고백을 간증하는 13개의 서신을 썼습니다. 간증의 복음 정점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인데 난 간 곳이 없고 구속하신 주님만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으로 향방이 같아야 하고 결국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구원으로 나의 추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충돌하여 깨어지는 것이 성령의 구조(rescue)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깨뜨리셨습니다.

 

구원을 막는 저주는 가치관과 미모와 지위 같이 안 깨어지는 것들입니다. ‘내가 맞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깨어지면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하게 되며 부활을 믿어야 이런 것들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스펙과 권세와 재물은 나를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깨어질 뿐입니다. Alexandria호 같은 곳에서 깨어진 널조각 같아야 구조되는 것인데 깨어져야 경사진 항만이 보이는 것이기에 내 속에 경사진 곳을 보아야 합니다.

 

죄인임을 알게 되면 따뜻한 말이 나오는 법이며 따뜻하게 대접을 하면 주님 영접이 쉬워집니다. 누구도 행위로는 천국에 가지 못하며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며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가는 길 주님께 맡기리이다’라고 생명을 내놓고 기도해야하는 것인데 피난처인 곳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빈곤 포르노를 이야기 하는데 목적이 구원 이어야 진정한 동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가해자인 것이기에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하지만 공의로 미워해야 할 죄는 떨궈 버려야 합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나눔에는 안식이 있는 법인데 모든 이야기가 성령의 이야기로 승화시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작과 마지막이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연약에 휩싸여 매여 있으므로 무식하고 용약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이 성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구속사인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아야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어 나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인 것입니다.

 

찬국에 가면 “예수로-모세로-여호수아로-갈렙로-우리아로-사무엘로-스테반로-엘리야로-베드로로-다윗로-솔로몬로-요나단로-요셉로-다니엘로-요나로-야곱로-아브라함로-이삭로-에스겔로-바울로-바나바로-마가로-누가로-마태로-요한로-히스기야로 등이 천국의 도로 명 아닐까요?”

샬롬!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