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23. 11. 14. 17:16

[스포츠외교 O.S.T. (Olympic Story Telling) 3(세계를 움직이는 스포츠 계 큰 별들: 故 金雲龍(Dr. KIM, Un Yong)과의 만남)]

 

*국제스포츠계의 거인 김운용 IOC부위원장(Dr. Un Yong KIM, a most influential international sport leader and IOC Vice President)

 

(김운용 IOC부위원장 겸 KOC위원장과 함께)

 

필자가 1982KOC(대한올림픽위원회)/대한체육회(Korea Amateur Sports Associationà추후 Korea Sports Council로 개칭되었다가 현재 영문 명칭은 Korea Sports and Olympic Committee)에 입사한 다음해인 1983년 당시 국제스포츠외교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한 김택수 IOC위원이 작고하였다.

 

1980년 모스크바 IOC총회에서 IOC위원장으로 선출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위원장은 고 김택수 IOC위원에 대한 올림픽훈장추서 겸 1988년 서울올림픽준비상황 점검 차 방한 하였다.

 

 

당시 KOC는 무교동 체육회관에서 체육회와 사무실을 같이 사용하고 있었던 과계로 9층 강당에서 올림픽훈장추서식(Ceremony for posthumous awarding of Olympic Order)이 있었고 필자는 불어로 사회를 보았고 통역도 겸했다.

 

 

훈장추서식 후 다른 일전 관계로 인근에 있는 조선호텔로 가는 도중 당시에는 WTF(World Taekwondo Federation: 세계태권도연맹/현재는 WT: World Taekwondo로 개칭)총재직만 맡고 있었던 김운용회장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필자에게 “CIO”(Comite International Olympique: IOC의 불어표기방법/“..로 읽힘)라는 말도 알고 불어를 제법 하는 구만이라고 말을 건넸던 것이 그분과의 첫 번째 조우(the first encounter)였다.

 

그 후 방한하는 전세계 IOC위원, 국제경기연맹회장 국제스포츠계 저명인사들의 국기원 방문 시 김총재께서 태권도 전세계보급현황 및 발전 추세 등에 대하여 직접 브리핑 차트를 놓고 일일이 넘겨 가면서 열성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모습들을 눈 여겨 보면서 이러한 열의와 노력이 머지않아 결실을 맺을 수 있겠다고 그때마다 막연히 생각하였는데 결국 그러한 끊임 없는 성실함과 집념이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가 1994년 파리IOC총회 겸 올림픽 콩그레스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견인차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1994년 Paris 개최 IOC총회에서 태권도의 Sydney2000올림픽 정식종목채택 결정을 지켜본 KOC대표단 좌로부터: KOC국제사무차장인 필자, 이강평 KOC사무총장, 박상하 대한체육회부회장)

 

필자와 두 번째 만남은 1992년 멕시코 아까뿔꼬(Acapulco)에서 열린 제8ANOC총회(General Assembly of the Association of National Olympic Committees: 전세계 국가올림픽위원회총연합회)시 함께 개최된 IOC집행위원회(IOC Executive Board)와의 연석회의석상에서 였다.

 

ANOC총회는 3일간 계속되었고 마지막 날인 4일차에 IOC집행위원회와 NOCs가 합동회의를 가졌는데 마리오 바즈케즈 라냐(Mario Vazquez Rana: 멕시코 IOC집행위원, IOC Olympic Solidarity Commission위원장 역임) ANOC회장과 함께 자리한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회의를 공동 주최하였고 각국 NOC 대표들이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때 “20세기 가장 훌륭한 올림픽대회(The Best Games Ever)로 평가 받는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개최국 NOC대표로서 이에 상응하는 질문을 해야 되지 않겠냐고고 당시 KOC대표로 참석 했던 김종열 KOC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과 최만립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께 건의하였더니, 필자 더러 질문을 하되 반드시 IOC1공식언어인 불어로 할 것을 주문하였다.

 

(멕시코 시티 및 아까뿔꼬 현지 신문에 소개된 기사 중 맨 우측 사진: Mexico City 1984 ANOC총회 당시 대한민국 KOC회의대표로 처음 참석하여 태권도의 올림픽정식종목 채택 건의 발언 중인 필자와 당시 최만립 KOC총무)

 

그 당시 다가오는 1996년 미국 GeorgiaAtlanta 올림픽대회에 새로 채택될 정식종목추가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가 아시안게임(Asian Games), 범미주대회(Pan American Games), 아프리카대회(African Games), 카리브해안대회(Caribbean Games), 지운해연안게임(Mediterranean Games)등 대륙 별 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세계태권도대회의 지속적인 개최, 전세계 5개 대륙에 120영개국이 넘는 회원국 수의 고른 분포와 보급, 그리고 태권도의 인기도와 기술적인 탁월함, 종목의 우수성 등을 내세워 주최국인 미국이 선호한 골프와의 경합 시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신중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어떠냐는 요지의 질문을 불어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국제골프연맹에서는 아직 유사한 요청을 공식적으로 한 바 없노라고 언급하는 등 직답을 회피하는 답변을 하였고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또는 IOC에서는 Korea로만 공식호칭으로 쓰도록 의전메뉴얼 상 되어 있음)을 남한(South Korea)라고 호칭하였다.

 

필자는 답변 내용의 불충분성과 대한민국 호칭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국가별로 커다란 번호가 쓰인 번호판을 다시 높이 들어올려 보충 확인 질문(point of clarification)요청을 하였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이를 보고도 일부러 못 본 척하였다.

 

그러자 ANOC회장(Mario Vazquez Rana), IOC사무총장(Francois Carrand/스위스)가 사마란치 IOC위원장에게 귀 뜸을 했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계속 딴소리만 해대자 필자는 계속해서 번호판을 높이 치켜 들고 좌우로 흔들어 대면서 추가발언권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자 전 세계 NOC대표들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듯이 회의장 전제가 웅성거리며 술렁이는 소리로 어수선해졌다.

 

이때 단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호주 IOC집행위원인 Kevan Gosper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운용 동료 IOC집행위원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자 김운용총재깨서는 필자에게 손짓으로 번호판을 그만 내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총재 겸 한국의 IOC집행위원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냥 번호판을 내려버리자 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사마란치 IOC위원장으로선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으리라.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임자/천적(Natural Enemy)는 있는 법.

 

총회 회의 직후 김운용 총재는 필자가 않아 있는 자리에 와서 시의 적절한 발언이었지만 상황 상 철회하는 것을 향후 목적 달성을 위해 불가피한 전략이라고 하면서 고마워하기도 했다.

그 후 몇 개월 후 김 총재는 KOC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출되어 2002년초까지 9년 간 필자와 함께 종횡무진 국제스포츠계를 누비게 되었다.

 

물론 필자는 김총재를 보필하고 지원하는 참모역할을 하면서 김총재의 국제스포츠계에서 출중한 능력과 다재 다능한 역량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득도 배우는 좋은 계기와 기회를 맞이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면에서 김총재께서는 필자에게는 국제스포츠계를 이해하고 국제적 흐름과 동향을 깨닫게 하고 국제스포츠계 인맥을 네트워킹하게 하시고 다양한 산교육의 장을 열어준 훌륭한 스승이며 멘토(mento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특히 2000IOC집행위원회 석상에서 아시아에도 훌륭한 인재가 있다라면서 필자를(Rocky 라고 지칭) 2008년 하계올림픽대회 IOC평가위원회 위원(한국인으로서 최초)으로 추천하여 IOC Directory(IOC주소 및 인명록)에 이름을 올리게 해 주었고 3개월 간 12개 유치후보도시들 중 결성리스트에 선정된 Beijing-Osaka-Totonto-Istanbul-Paris 5개 유치결선진출 후보도시들을 두루 현장방문하면서 현지 실사 및 적격여부를 결정하는 집중 회의에서 그 동안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즉석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덕분에 Jacques Chrac 프랑스 대통령 궁을 방문하여 준비한 불어 발언으로 칭찬과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중국의 장쩌민(강택민), 일본의 모리 수상, 캐나다의 Cretian 총리, 이스탄불 총리 등을 직접 면담하며 스포츠외교의 정점을 찍을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IOC와 전세계 스포츠 계에 한국스포츠외교관의 우수성과 실력을 입증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3개월 간의 귀중한 IOC평가활동을 경험하고 실전의 노하우를 습득하도록 배려해 주신 故 김운용 총재 겸 IOC부위원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김운용 IOC부위원장의 말씀대로 기회는 누가 거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기회가 올 때 포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누가 누를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각자 최대한 활용해서 스스로 커나가는 것이리라.

 

대한체육회/KOC내에서 국제부장-국제사무차장-IOC총회(서울1999)준비조직위원회총괄 CEO COO 등의 전권을 필자에게 부여하여 여러거지면에서 승승장구하자 일각에서는 김운용회장이 키워주는 실세라는 소문이 팽배해 지고 시기질투와 시샘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하게 되자 김운용회장께서는 대한체육회 간부회의 석상에서 실세라는 것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거저 지목해서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일 잘하는 사람이 실세라고 실세의 정의까지 내려 주셨다.

 

 

 

 

고인이 되신 김운용 IOC부위원장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국제스포츠계의 실세이고 국제연맹(태권도)회장(WTF창설총재)-World Games창시자-ARISF회장-GAISF회장-IOC TV분과위원장-대한체육회장/KOC위원장-대한태권도협회장-Syney2000 올림픽개회식에서 남북한 최초의 공동입장을 주도하시고 무엇보다도 태권도를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스포츠외교력을 발휘하신 일등공신-IOC위원장 후보경쟁에서의 차점자 등 그분이 남기 족적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스포츠역사상 모든 부분을 골고루 섭렵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스포츠계에서 따를 사람이 없다.

 

김운용회장은 한국스포츠외교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외교관의 표상이다.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 스포츠외교를 다시 중흥하도록 썩어지고 죽어지는 밀알이 되고자 한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필자를 아껴 주시고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날 문자메시지를 보내시며 곧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시다가 유명을 달리하셨다.

 

2008ANOC총회 개회식에서 필자가 한국 최초로 수상한 ANOC공로훈장과 20221021Thomas Bach IOC위원장이 사상 최초로 수상 대상인 필자의수상을 위하여 서울로 와서 공식 수여식을 통해 전수한 IOC쿠베르탱메달도 김운용 IOC부위원장의 영전에 올려 드린다.

 

 

 

 

[체육계에 회자되고 있는 故 김운용 IOC부위원장 배신자 프레임에 대한 진실(眞實)과 실상]

 

 

누군가 제가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의 배신자란 프레임으로 저를 매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2017 930일 제 블로그에 올린 글과 동아일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운용 총재(대한체육회 회장) 시절, 모든 국제업무에 관한한 실무를 총괄했던 저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덧씌워 놓은 프레임으로 보입니다. 김운용 배신자 프레임으로 이득 본 자를 찾아보면 될 듯 합니다.

 

그 프레임 덕에 저는 오랜 세월 체육계의 아웃사이더로 배척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저 대신에 그들은 체육계 요직에 들어 앉아 활동을 이어왔겠지요.

 

저는 국내 체육계에서는 아웃사이더였지만 국제 체육계에서는 여전히 인사이더로 인정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22 1021 ANOC 서울 총회 말미에 Bach IOC위원장은 IOC집행위원회 결정대로 서울에서 귀하디 귀한 IOC쿠베르탱 메달을 직접 전수해 주기도 하였으며 2023 425일에는 제게 전국공모로 2027년 충청권 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음을 보고 드리니 축하 서한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스포츠 외교는 그래야 합니다. 입도 벙긋 못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누가 말을 걸어주나요?

 

체육계에서 시기와 질투로 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지만.. 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와 서울 올림픽 유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주요국제인사를 묶어주는 치열한 스포츠 외교 현장이었습니다.

 

결국 그 날의 휘젓고 다님이 인정되어 2022 1022일 오세훈서울시장이 로잔에서 Bach IOC위원장과 회담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시기하던 자들의 배신자 프레임, 혼자 설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삐뚤어진 시각, 국제 스포츠 외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화뇌동, 게다가 스포츠외교현장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의 편향된 시각이 오늘날 나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故 김운용회장께서는 옥중에서도 저를 찾으셨고 출감하셔서는 임종하는 그날까지 저와 한 달에 2회정도 만나 정다운 식사와 대담을 이어 가셨고 평창2018 동계올림픽 기간 중 현장에도 사모님, 둘째 따님과 사위와 함께 찾아 오셔서 강릉에 거주하던 주말 직접 차까지 보내 주시어 봉평에서 메밀 전병과 국수를 사 주시며 함께 환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돌아가시는 그날에도 제게 마지막 문자까지 보내주셨는데 그 기록이 동아일보 기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네요.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스포츠외교사의 불세출의 큰 별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 의 족적(동아일보 기사)]

 

 

한국스포츠 계의 큰 별 김운용  IOC부위원장이 지난 103일 감기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쉬다가 새벽(0221) 평안하게 영면에 들어 가셨습니다.

 

필자에게 930일 문자로 "2년 만에 감기 증상으로 쉬고 있음"이라는 메시지가 고인의 마지막 메시지가 된 셈입니다.

 

 

 

 

유족의 뜻에 따라 대한체육회장장 대신 태권도 장으로 7일 간 문상을 마치고 109 08:30 국기원에서 장례 영결식을 치릅니다.

 

IOC측에서는 싱가폴 출신 IOC집행위원 겸 IOC재무위원장이 108일 방한하여 빈소방문 및 영결식에 참석합니다.

 

아래 내용은 필자와 인터뷰 후 동아일보가 108일 자 신문기사로 내 보낸 고 김운용前 IOC부위원장에 대한 글 (사람속으로//[명복을 빕니다]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람속으로(동아일보2017 108일 자)

 

[명복을 빕니다]김운용 IOC 부위원장

 

 

6개 언어 능통 ‘태권도 대부’… 한국 스포츠 외교에 큰 족적

 

 

 

6개 언어에 능통한 ‘국제인’이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불릴 만큼 스포츠 외교에 정통했던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사진)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 

지난달 27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개촌식에 다녀온 고인은 이후 감기 증세를 보이다 2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으나 다음 날 오전 타계했다.

 

지난달 30일 “감기가 들어 잠시 쉬고 있다”는 것이 고인의 측근이었던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였다

“결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탁월한 외교적 수완은 늘 우리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작고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스페인)은 생전의 김 전 부위원장을 이렇게 평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에 도전했던 한국 스포츠 외교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2004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후원금 유용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됐고, 이후 징역 2년과 추징금 78000여만 원을 선고받은 뒤 복역했다. 2008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 복권됐다.

1986
IOC 위원에 선출된 고인은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IOC 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서울 올림픽과 한일 월드컵 등 국제대회 유치에 기여했다. 국기(國技)인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북 공동 입장을 성사시킨 것은 고인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윤 원장은 “각종 스포츠 회의를 국내에 유치하면서 관련 인사들이 반드시 국기원에 들르도록 했고 군대식 차트를 넘기면서 태권도에 대해 설명했다”며 태권도의 세계화에 앞장선 일을 기억했다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릴 적부터 육상 단거리와 씨름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유도, 복싱, 스피드스케이팅, 태권도 등에도 도전할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6·25전쟁을 만났다. 통역 장교로 입대해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연설을 통역하기도 했다.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으로 일했던 고인은 ‘태권도 세계화’를 목표로 1971년부터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았다.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되면서 국제 스포츠 무대에 진출했다. 1986 IOC 위원이 된 뒤 1988 IOC 사상 최단 기간(1 10개월) 만에 집행위원이 됐다. 1992년에는 역시 최단 기간(5 9개월) 만에 IOC 부위원장에 올랐다. 16대 국회의원(비례대표·새천년민주당)으로 정계에도 몸담았다. 그러나 2000년에 터진 2002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유치를 둘러싼 뇌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2001IOC 위원장에 도전했으나 자크 로게(벨기에)에게 패했고 2002년에는 9년 동안 이끌었던 대한체육회장에서 물러났다. 고인은 이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방해설에 시달렸는데 생전에 이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다. 2005년 복역중 IOC 위원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고인은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일본 NHK의 스모 중계방송 때 특별 해설을 한 적도 있다. 스포츠 외교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2015년 스포츠영웅에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동숙 씨와 아들 정훈 씨, 딸 혜원 혜정 씨가 있다. 장례는 태권도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9일 오전 7. 영결식은 9일 오전 8 30분 국기원에서 열린다.


김종석 kjs0123@donga.com·이승건 기자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