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Asian Games) 역사와 2023년 9월 열리는 Hangzhou2022 아시안게임]
Hangzhou2022아시안게임은 금년 9월23일~10월8일 열리며 이어서 10월22일~28일에는 파라 아시안게임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Olympic Council of Asia) 조정위원회는 지난 3월 Hangzhou를 방문하였으며 Husain Al-Musallam OCA사무총장은 “도시는 대회 준비가 되어 있으며 스포츠 인프라도 완비되었고 숙박과 선수촌도 준비되어 있다”(the city is ready now, the sport infrastructure is ready, the accommodation is ready, the Athletes' Village is ready )라고 하면서 제반준비상황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Hangzhou2022아시안게임은 40개 종목, 61개 세부 종목 경기에 483개 메달이 걸려 있으며 10,0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시아 패럴림픽 위원회(Asian Paralympic Committee)가 관장하는 파라 아시안게임은 22개 종목 경기가 19개 경기장에서 치러지는데(set to feature 22 sports across 19 venues) 그 중 17개경기장은 아시안게임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아시안게임의 역사>
아시안게임의 역사는 욥기(Job: 8장 7절)말씀처럼 '시미나창'(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다./ Your beginnings will seem humble, so prosperous will your future be)로 표현 될 수 있겠습니다. (The Asian Games is shaped by humble roots but rapid growth.)
대회 참가국 등 종합적인 견지에서 보아도 아시안게임은 올림픽 다음으로 규모가 최대인 메가 스포츠이벤트입니다.
1951년 창설된 아시안게임은 사실 보잘것없었습니다.
제1회 대회에는 아시아 대륙 11개국에서 500명도 채 안 되는 선수들이 참가하였습니다.
1913년 제1회 동양 올림픽(the 1st Oriental Olympics)이라고 명명되었던 아시아 스포츠대회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Hangzhou2022대회 기간 중 아시안게임 11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중에 있다고 합니다
일본, 말레이지아, 태국, 자유중국(대만) 및 홍콩 그리고 개최국 필리핀 등 달랑 6개국이 전체 참가국이었습니다.
이 대회는 1934년 제10회 극동 선수권대회(the 10th Far East Championships)까지 명맥을 유지 한 바 있습니다.
아시안게임의 효시 격인 이 대회는 두 번에 걸친 명칭변경과 함께 유지되다가 1938년 일본 도쿄 개최 예정이던 제11회 동양선수권대회(the 11th Oriental Championships)가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으로 인하여 대회 조직이 무산되었습니다.
1) Oriental Games(1913년)
2) Far East Championships(1934년까지)
3) Oriental Championships(1938년 대회취소)
4) Asian Games(1951년부터)
여러가지 사정으로 아시아대륙 국가들의 대회 참가가 어려워지자 1934년 제1회 서아시안 게임(the 1st West Asian Games)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제1회 서 아시안게임 참가국(4개) 리스트:
1)아프가니스탄
2)스리랑카
3)인도
4)팔레스타인
1938년 제2회 서아시안게임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취소되었으며 그 이후 10여 년 간 아시아 스포츠 발전의 침체기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종식과 많은 아시아 신생 국들이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자 아시아대륙의 초점은 다시 스포츠경기장으로 모아졌는데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 기간 중 아시아 스포츠지도자들은 극동 선수권대회(Far East Championships)부활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왕족 출신 His Highness Maharaja Yadavindra Singh은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큰 진전은 없었으며 그리고 2년 후 인도 크리켓 선수출신의 M. Y. Singh은 아시아가 하나의 대륙이며 따라서 별도의 단일 게임(a single Games)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지도자들도 동조하였다고 합니다.
아시안게임이 창설된 것은 1947년 당시 인도 IOC위원이었던 “손디”에 의해 주도 되었으며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던 13개국 아시아 국가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했는데 이중 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아시안게임개최를 위한 준비협의회를 가졌습니다.
1)한국
2)자유중국(대만/Chinese Taipei)
3)필리핀
4)버마(미얀마)
5)스리랑카
6)인도
1949년 2월 다시 인도 뉴델리에서 아시안게임연맹(AGF: Asian Games Federation)을 결성하기 위한 협의회가 개최되었으며 뉴델리 협의회에서 제정된 헌장이 IOC에서 승인되어 정식으로 AGF가 창립되었습니다.
AGF초대 회장은 인도의 Yadavindra Singh(손디)이 선출되었습니다.
*AGF최초 가맹국:
1)인도
2)아프가니스탄
3)버마(미얀마)
4)파키스탄
5)필리핀
6)한국
AGF는 제1회 아시안게임을 1951년 3월4일부터 11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키로 하였으며 이 대회에는 모두 11개국이 참가하였지만 한국은 AGF 및 아시안게임 창설 국이면서도 6.25 사변으로 참가치 못했습니다.
*제1회 뉴델리 아시안게임실시 종목(6개):
1)육상
2)수영
3)농구
4)사이클
5)축구
6)역도
*참가국(11개):
1)아프가니스탄
2)버마(미얀마)
3)인도
4)인도네시아
5)이란
6)스리랑카
7)일본(1948년 대회부터 참가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참가)
8)네팔
9)필리핀
10)싱가폴
11)태국
Athletics was among six sports contested at the 1st Asian Games in 1951. (출처: OCA)
창설 대회는 예정보다 1년 늦었지만 올림픽대회의 중간 년도에 개최한다는 원칙에 따라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은 1954년 5월1일-9일 개최되었습니다.
제1회 아시아게임에서 실시되었던 마라톤과 사이클 종목은 중지된 반면 수영은 접영과 평영을 분리하여 실시했고 예술작품 전시회도 곁들여졌습니다.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에는 18개국에서 1,241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고 휴전 직후 81명 규모의 선수단(선수 59명 임원22명)을 파견한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6개, 동메달 5개 등 총 19개의 메달로 종합 3위를 차지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처음 출전한 제2회 마닐라대회에서 일본, 필리핀에 이어 종합순위 3위를 차지하여 아시아대륙 스포츠강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은 제1회부터 제8회 아시안게임까지 줄 곳 종합성적 1위로써 아시아 스포츠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아시안게임은 인도인 Maharaja Yadavindra Singh이 창설하였고 제1회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조직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Raja Bhalandra Singh은 1951년 제1회 뉴델리 창설 대회에 이어 1982년 아시안게임을 뉴델리에서 다시 개최하였습니다.
(Raja Balandra Singh 인도 IOC위원겸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필자, 고 김종열 한국선수단장(추후 KOC위원장 역임)
인도 IOC위원을 역임한 Balandra Singh의 아들인 Raja Randhir Singh은 IOA 및 OCA 사무총장 그리고 IOC위원으로도 역임한 바 있습니다.
(Raja Randhir Singh 인도IOC위원 겸 OCA사무총장과 함께)
(좌로부터 필자, 김동호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Randhir Singh OCA사무총장 겸 인도 IOC위원, 이승원 FIS집행위원 겸 아시아 스키연맹회장/ 1999년 용평)
그후 AGF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기간 중 OCA(Olympic Council of Asia)로 개편되었고 초대회장은 오일달러를 앞세워 헤게모니를 잡은 중동의 소국 쿠웨이트 왕족 출신 고 Sheikh Fahad Al-Ahmad Al-Sabah 쿠웨이트 IOC위원이 단일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좌로부터 故 Sheikh Fahad OCA초대회장 겸 쿠웨이트 IOC위원, 필자, 故 정주영 KOC위원장/1983년 서울)
(태릉선수촌을 방문한 故 Sheikh Fahad OCA회장<우-1>, 故 김성집 태릉선수촌장<좌-1>, 필자<가운데>)
(1982년 AGF를 대신하여 창설된 OCA초대 사무총장인 Air Vice Marshall Mehta와 함께/1986년 서울)
1990년 아락의 쿠웨이트 무력침공 중 사망한 초대 OCA회장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Sheikh Ahmad Al-Fahad Al-Sabah가 중동세와 인도를 비롯한 남중아시아 약소국들을 들러리로 내세워 표를 결집한 결과 또 다시 OCA회장직을 세습(?)한 형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관련 역사적 담판 협상을 마무리하고 나서: 좌로부터 필자, Sheikh Ahamd OCA회장, Muttaelb OCA사무국장, 故 한기복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사무총장/2000년 쿠웨이트 OCA본부)
그는 쿠웨이트 IOC위원, OCA회장(1991~2021), 아시아 핸드볼연맹회장, OPEC의장 역임, 쿠웨이트 에너지 장관을 거쳐 지금은 쿠웨이트 부총리 직까지 역임했던 실세였지만 스위스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IOC위원, ANOC회장과 OCA회장직 모두 사임한 바 있습니다.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스포츠외교는 40년 넘게 중동의 소국 쿠웨이트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