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 2021년 9월19일 주일예배 말씀 요약(시편 24:1~10 영광의 왕/ 이태근목사)]
<시편 24편1절 ~ 10절>
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The earth is the LORD's, and everything in it, the world, and all who live in it)
2절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for he founded it upon the seas and established it upon the waters)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Who may ascend the hill of the LORD? Who may stand in his holy place?)
4절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He who has clean hands and a pure heart, who does not lift up his soul to an idol or swear by what is false)
5절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He will receive blessing from the LORD and vindication from God his Savior)
6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Such is the generation of those who seek him, who seek your face, O God of Jacob (셀라/Selah)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Lift up your heads, O you gates; be lifted up, you ancient doors, that the King of glory may come in)
8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Who is this King of glory? The LORD strong and mighty, the LORD mighty in battle)
9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Lift up your heads, O you gates; lift them up, you ancient doors, that the King of glory may come in)
10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Who is he, this King of glory? The LORD Almighty-- he is the King of glory (셀라/Selah)
<Prologue>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찬양하는 시인데 제가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기에 입으로만 하는 설교가 될 것 같아서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힘들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영광의 왕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악을 쓰며 살아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원망이 찬양이 되고 불평이 찬송이 되며 우리의 고난이 ‘할렐루야~ 아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요약>
영광의 왕을 찬양하려면,
1.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절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그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꽃과 땅 거기에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를 다 의미하고 세계화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모든 인류와 인간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면 발달할 할수록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집도 내 것이고.
차도 내 것이고 땅도 내 것이기에 다 여호아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 고백하려면 많은 사건들이 오고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1~ 2절 말씀) 그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화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며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한글 개혁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 1절과 2절 사이에는 접속사 왜냐 하면이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히 집도 내 것이고 차도 내 것이고. 땅도 내 것이겠지만 그것이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에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3일째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통하여 첫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 창 위에 물과 궁창 아래에 물을 나누셨는데 궁창 위의 물은 노아 홍수 이전까지 아마도 모든 피조물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으로 모든 유해물질을 차단하고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주셨을 텐데 인간의 타락으로 노아의 홍수가 발생하자 창조 질서가 일부 깨지고 궁창 위의 물이 다 쏟아져서 환경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지창조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는 위와 아래의 물을 나누셨는데 셋째 날에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또 물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이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이처럼 나뉘어야 할 것이 있고 한 곳으로 모으고 드러나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어요 한쪽은 모여서 바다와 강이 되고 또 한쪽은 뭍이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합니다.
둘 다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고. 각자 알맞게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도 창조의 질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 가운데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뒤죽박죽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생이 공허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모으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나누는 것이 먼저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모으고 쌓고 더 긁어 모으고 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에 가진 것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으면 내 마음과 생각 속에도 어두움과 빛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날마다 어둠의 생각과 빛의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갈등 충만이 성령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이 과연 빛의 생각인지 어둠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도 비로소 첫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절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며 강들 위에 건설 하셨도다.
무슨 말인가 하면 쉽게 설명해서 너희가 땅 위에 집을 짓고 문화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해서 스스로 교만한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터가 바다 위에 세워졌고. 강들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변가의 모래성도 쉽게 무너지는데 하물며 바다와 강들 위에 세워진 것들이 온전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언제든지 노아의 시대처럼 모든 땅을 받아야 잠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큰 걱정 없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가 계속되면 그것은 나의 권리가 되고 나의 일상이 되기 때문에 집도 차도 땅도 내 것이고 자녀도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터를 바다와 강들 위에 세우고 건설했기에 유라굴로 강풍이 한 번 불면 276명을 태운 큰 배도 한순간에 파손될 수 밖에 없다고 지난주와 이번 주에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터를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면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그 기초가 너무나 허약하기에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용#1)
-여전히 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만 주님의 것이라고 하며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없습니까?
-내 힘으로 쌓아 올렸지만 그 터와 기초가 너무 약해서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없습니까?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잘 세워지고 있습니까?
지난주 아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이제 저의 주제가는 다른 인생을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목사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인테리어 하는 집사님을 봐도 너무 재밌을 것 같고 따라다니면서 그 옆에 그거 하고 프로그램 코딩 짜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신기하고 하다못해 한동안 목사 그만하고 떡볶이 장사라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목사의 직분을 가볍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제 오히려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교회도 많고 훌륭한 목사님도 정말 많을 텐데 내 옷에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랫동안 입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항상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습니다 물론 저도 부르심도 있었지만 또 한편에는 이제 어찌하다 보니 목사가 되었다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 빛과 어두움이 오랫동안 함께 공존을 했습니다 하지만 또 제가 5번 유형이다 보니 뭐든지 직접 해보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뭐든지 앉으나서나 생각만 하고 있기에 내가 아닌 아들 민산이를 통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또 제가 민산이한테 너 이거 해 봐라 저거 해 봐라 강요한 적이 저는 한 번도 없어요.
너는 부르심을 받지 말고 그냥 너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그런 후회도 없을 거라고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악한 생각 인지도 모르면서 혼자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소명 의식이 없고 오랫동안 딴 생각 쓸데없는 생각 더러운 생각을 하며 살았기에 물에 잠겨 있는 땅처럼 쓸모 없는 땅이 되어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망하는 인생이 될 뻔했습니다
영광의 왕을 찬양하려면,
2. 행위가 아닌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약은 율법의 말씀이고 신약은 은혜의 말씀인데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까 생각할 때 구약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언제든지 죄만 지적할 뿐 말씀에 대한 은혜와 구원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나의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의 고난이 약재료가 되고 나의 상처가 별이 되어 예수님 만난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 되었잖아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줄이고 예수 만난 이야기를 많이 하는 복되고 즐거운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도 양대 산맥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첫 번째 산은 광야에 있는 시내(Sinai)산이고 두 번째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Zion)산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산의 위엄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에요 뒷동산이 아니에요. K2 에베레스트 산 그런 정도 목숨을 걸고 올라가야 하는 그런 산입니다 모세 자신도 내가 힘이 두렵고 떨린다고 했어요 출에굽기 19장 말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의를 경계하고 너희는 산과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 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니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이 산에 올라오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구약의 율법은 이처럼 어두움이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빛 대신 예수님이 반드시 먼저 찾아 오셔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호와의 사는 율법을 주신 시내산이 아니고 성전이 세워진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자신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어린 양을 준비해 주신 곳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주신 신의 산에는 오직 모세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진 시온 산에는 과연 누가 올라갈 수 있을까요?
4절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첫 번째는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위가 깨끗해야 한다는 거예요. 청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는 이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손을 더럽히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탈한 데 두지 않아야 합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외적인 행위만 깨끗해서는 안 되고 그 마음과 뜻이 근본적으로 청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붙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앞에 두 가지의 조건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인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다시 3절에서 5절 말씀을 봅니다.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절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절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율법이 있는 시내 산은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올라가지 못할 것 같고 성전이 세워진 시온 산은 자격이 안 돼서 올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3절~4절. 말씀은 행위가 아닌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손이 얼마나 더러운 지를 알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나의 더러운 손을 씻고 깨끗한 손으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기 위해 시온산에 올라갔지만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해 주신 원리와 똑같습니다 나의 마음이 불결하여 허탄한 것을 계속 생각한다면 나의 더러워진 마음을 공동체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창녀의 마음이 아닌 청결한 마음으로 여호와 산에 올라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를 얻는 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의미이죠 더 확실한 증거가 6절 말씀에 나옵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3절에서 5절 말씀이. 만약 조건 행위 강조했다면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요셉의 하나님을 찾았을 텐데 성경은 언제든지 야곱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의 뜻은 속이는 차이 이잖아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서의 장자 권을 빼앗고 털가죽과 별미로 아버지 이삭을 기만하고 그렇게 속이는 인생을 살다가 외삼촌 라반에게 잘못 걸려서 20년간 종 노릇을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 너무 못 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한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야곱이 여자 좋아하고 돈을 좋아했기 때문에 남에게 책임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내가 누구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데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라고 분명히 세 가지 조건을 달아 놓았는데 그 결론이 요셉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나의 행위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자는 없고 오직 은혜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산에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데리고 번제를 드리러 올라간 거예요 하지만 내 의로 어떻게 번제를 드리겠어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해 주셨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우리들 공동체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는 데에 또 여러분들은 어떤 인생을 사셨습니까?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마음으로 음란을 행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다가 나보다 더 강한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나 갖은 고생을 하고 인생을 낭비하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우리들 공동체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수고가 너무 많으셨습니다 내가 요셉처럼 살지 못했을지라도, 야곱처럼 속이는 인생을 살았을 지라도, 나의 피 묻은 손을 보며 회개하고 나의 창녀와 같은 마음을 회개하며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은 무섭고 두려운 신의 산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는 시온산입니다.
(적용#2)
-나의 피 묻은 손과 창녀 같은 마음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되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여전히 옳고 그름으로 쉬운 산이 아닌 신의 산을 올라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높은 산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로 사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행위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부르심을 받았으나 소명의식이 없고 언제라도 또 기회가 되면 목사의 직분을 내려놓고 그냥 주의 백성으로 살고 싶었기에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기쁨 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사역을 하다가 여러 번의 치리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치리(治理)는 말씀이 아닌 지식으로 목자 모임을 인도하다가 받았고, 두 번째 치리는 말씀이 아닌 내 열심으로 다음 세대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가운데 내 생각 내 방법이 가장 옳은 것 같아서 담임 목사님과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노트북을 들었다 놨다 드러났다 내려치다가 혈기를 부리다가 또 치리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치리는 설교를 들어도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씀이 잘 깨달아지지 않으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고 이원론이 아닌 이원론으로 ‘백보좌 심판’을 설교하다가 또 치리를 받았습니다. 삼진 아웃이라는 말도 있는데 지난 10여 년 동안 세 번이나 치리를 받으면서 계속 붙어간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체면이 있지도 않고 앞으로 내 인생에 이제 더 이상 치리는 받지 않겠다고. 내 의로 굳게 다짐을 했는데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또 네 번째 치리를 받았습니다 처음 치리를 받을 때는 억울한 것도 있었는데 치리를 이제 한 번 두 번 세 번 거기다 네 번까지 받다 보니 이제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이제 내가 무엇 뭔가를 잘못해서 치리를 받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딴 생각을 하고 언제라도 그만 생각을 하고 은혜가 없고 행위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동료 사역자들과 소통이 안 되고 혼자 독불장군처럼 사역을 하다 보니 담임 목사님께서도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백<白>보좌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 묘사되고 있으며 불신자들이 불 못에 던져 지기 전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0장 7-15절로부터 이 심판이 천년왕국 이후, 그리고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 못으로 던져진 이후에 발생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20:7-10). 펼쳐진 책들(계 20:12)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과 행위와 말을 다 아시기 때문에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고, 주께서는 그 기록에 따라 각 사람에게 상이나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시 28:4; 62:12; 롬 2:6; 계 2:23; 18:6; 22:12).
율법으로 저를 또 다스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힘들게 산을 올라온 것 같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라고 한 번 두 번 미리 사인을 주시고 ‘너 그러다가 정말 죽는다’고 하셨는데 내가 스스로 율법이 돼서 여전히 옳고 그름을 따지며 시내산을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니 네 번의 치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높이 올라와서 내려가는 길도 잃어버린 것 같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민산이가 아닌 저에게 큰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영광의 왕을 찬양하려면
3.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립니다.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웅장한 찬양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문들아 머리 들어라’ 바로 이 곡이 그런 찬양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교회에서도 코로나 이전에는 한때 한참 많이 부를 때가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었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코로나가 다 지나가고 다 함께 모여서 이 찬양을 부르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시편 2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썼을까? 이렇게 학자들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오벳에돔의 집에서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에 부른 찬양시일거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7절 말씀 다시 봅니다.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원한 문들(ancient doors)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영원한 문들은 하늘 성수의 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여기서 ‘들지어다’는 능동 명령형이에요.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여기서 ‘들릴지어다’는 수동 명령형입니다. 즉 짧은 한 절이기는 하지만 이런 의미가 담겨있어요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리고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하늘의 문도 열리지가 않습니다. 문들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들어 왕의 입성을 환영하는 장면이고 ‘들릴지어다’는 영광의 왕 앞에 문들이 필연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 천부장들이 다 함께 모여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언약계를 즐거이 매고 들어올 때에 다윗이 그 앞에서 기뻐 뛰며 춤추며 찬양을 했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그 모습을 창틀에 기대어 머리를 빼꼼이 내밀고 쳐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어찌 왕이 되어서 체통도 없이 계집종 앞에서 저렇게 몸을 드러내며 방탕하게 춤을 추냐?’고 심중에 자기 남편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 다윗에게도 닫힌 마음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도 굳게 닫혀 있는 마음에 문들에게 머리를 들라는 것은 시적 표현인데 빼꼼이 문을 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문을 활짝 문짝 전체를 들어올리라는 표현입니다 내 마음이 열려야 하늘의 문도 열립니다
다윗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사울의 딸 미갈이 되어 자기 상처, 자기 연민으로 궁궐 안에 홀로 틀어박혀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공동체가 하나도 없이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비록 여전히 다윗의 아내이지만 여전히 가진 것도 많지만 집도 궁궐에서 살고 있지만 미갈의 인생이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장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남편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기 나눔을 할 때 무슨 얘기를 하나 얼굴을 빼꼼이 내밀고 남편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계집종처럼 힘든 이야기를 조잘조잘할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들어야 합니다.
왜 남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내 마음이 닫힌 마음이고 미갈과 같은 마음입니다 지난주에 한 청년으로부터 장문의 카톡이 왔습니다.
짧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자기의 죄패는 동성애인데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교회에서 기도할 때마다 사용하는 수식어 하나 때문에 이제 자꾸 시험이 든다는 거예요 낙태와 간통에 대해서 기도할 때는 나라에 근간을 흔든다는 수식어를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꼭 동성애와 관련된 차별금지법 평등법 내는 그런 수식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고 인구 절벽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하시는 것 같기도 한데 요즘 남녀가 결혼을 해도 출산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 동성애와 관련해서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꼭 그런 수식어를 써야 하는 건지 자꾸 시험에 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잘못하면 이제 논쟁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제 우리들 교회 등록하신 지 오래되셨고. 어떻게 공동체에 붙어 가려고 애쓰는 것을 또 잘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댓글을 달아드렸어요. 그랬더니 이제 잠시 후에 이제 진심 어린 답변과 기도에 감사하다는 댓글이 왔습니다. 그런데 또 잠시 후에 이런 댓글이 달렸어요.
하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든다는 흔드는 수식어가 제게는 이 나라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자꾸 들린다는 거예요. 만약에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비행 청소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매일 매주 매월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 제 마음은 어떻겠어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죄송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톡이 왔습니다 많은 갈등 속에서 범민 속에서 정말 조심스럽게 자기의 의견을 남겨주셨기에 저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논쟁이 될까 봐 조심스럽기는 한데. 당연히 나라의 미래를 망치는 비행 청소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 적절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동성애자들을 위해서 기도 하자고 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한 표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동성애 법을 막아달라고 기도하는 것까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수식어 하나에 걸려 있다기 보다는 여러 가지로 걸리는 부분이 있기에 가장 약한 고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걸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고. ‘여러 가지로 힘든 부분이 있을 텐데 그래도 공동체 떠나지 않고 공동체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렇게 답을 찾으려고 하는 부분에 응원을 보냅니다 내가 어떻게 안 되는 부분을 주님께서 만져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답을 드렸습니다 ‘문들라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능동태와 수동태로 명령을 해 주신 것처럼 먼저 내가 머리를 들어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미처 다 열지 못하는 그 문을 주님께서도 함께 열어주시기를 온 성도가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9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앞절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요. 그만큼 중요하고 강조하고 싶은 강조할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 ~ 24편은 찬양 시로 분류가 되지만 동시에 메시아 예언시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말씀의 언약궤라고 하지 않고 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시는 개선장군처럼 메시아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마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실 때에 청군 천사가 함께 모여 행군 나팔을 불며 영광의 왕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께서 하늘에 있는 성전으로 이제 들어가시니 문들아 너의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천국 천사가 외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의 문도 열리고 하늘의 문도 열린 것처럼 내 마음도 우리의 마음도 열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 그와 더불어 먹고.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 다. 함께 기뻐하며 찬양하며 뛰어놀 때 자기 연민 자기 상처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있는 우리의 자녀와 식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먼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화가 나서 쾅쾅쾅 두드리지 말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사랑이 느껴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의 노크소리가 되도록 자녀들의 방문 앞에서 또 남편의 방문 앞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문 밖에 서서 악쓰지 말고 고함치지 말고 우리의 소리가 음성이 되어 그 문이 열릴 때까지 함께 기도하는 저와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3)
-나의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까? 닫힌 마음입니까?
-여전히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하며 찬양할 때 혼자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문 밖에 서서 두드려야 할 나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Epilogue>
1) 영광의 왕을 찬양하려면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2) 영광의 왕을 찬양하려면 행위가 아닌 은혜를 구해야 한다.
3)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린다.
4) 목적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허망한 인생을 살 뻔 했는데 이제는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라고 하시며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5) 오늘 주신 말씀으로 명절 연휴를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가족이지만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먼저 포기하지 않도록 먼저 우리가 마음에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6) 임으로 고백하지만 마음으로 고백하려면 고난을 통과하여야 한다
7)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첫째 날이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과 언약이 되어 인생에 노아의 홍수가 없을 것이다
8) 은혜가 계속되면 권리가 되어 교만해 지게 된다
9) 빛과 어둠이 나뉘어야 하는데 공존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10) 뭍이 드러나야 쓸모 있는 땅이 되는 것이다
11)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 이야기이고 신약은 이니 오신 예수님 이야기다
12) 상처가 별이 되어 내가 예수 만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13) 시내 산은 무섭고 두려운 율법을 주신 산이며, 시온 산은 여호와 성전이 세워진 산이다
1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1) 손 청결(외적 행위) (2)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는 마음과 뜻의 청결을 (3)인간과의 관계에서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청결함에 근간을 두는 것이다
15) 행위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16) 우리의 원망이 찬양이 되고 불평이 찬송이 되며 우리의 고난이 ‘할렐루야~ 아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7) 천지창조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는 위와 아래의 물을 나누셨는데 셋째 날에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또 물이 드러나게 하셨다
18) 나뉘어야 할 것이 있고 한 곳으로 모으고 드러나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 19) 한쪽은 모여서 바다와 강이 되고 또 한쪽은 뭍이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한다.
20) 둘 다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고 각자 알맞게 쓰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1)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인생도 창조의 질서 속에 살아가야 한다.
22) 내 인생 가운데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뒤죽박죽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생이 공허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다.
23)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것인데 모으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나누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24) 이 땅에 살면서 모으고 쌓고 더 긁어 모으고 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에 가진 것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고 가진 것이 많아도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다
25)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으면 내 마음과 생각 속에도 어두움과 빛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6)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날마다 어둠의 생각과 빛의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27) 갈등 충만이 성령 충만이라고 했으니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이 과연 빛의 생각인지 어둠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으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28) 은혜가 계속되면 그것은 나의 권리가 되고 나의 일상이 되기 때문에 집도 차도 땅도 내 것이고 자녀도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9) 그 터를 바다와 강들 위에 세우고 건설했기에 유라굴로 강풍이 한 번 불면 276명을 태운 큰 배도 한순간에 파손될 수 밖에 없다
30) 우리가 그 터를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면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그 기초가 너무나 허약하기에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31) 바다는 물이 모여서 더욱 풍성해지고 뭍은 드러나므로 마른 땅이 되어야 씨 가진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오랫동안 딴 생각 쓸데없는 생각 더러운 생각을 하며 살았기에 물에 잠겨 있는 땅처럼 쓸모 없는 땅이 되어 인생이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망하는 인생이 될 뻔한 것이 우리 인생이다
32) 구약은 율법의 말씀이고 신약은 은혜의 말씀인데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
33)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까 생각할 때 구약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34) 율법으로는 언제든지 죄만 지적할 뿐 말씀에 대한 은혜와 구원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구약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35)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다
36) 우리도 언제든지 나의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살았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의 고난이 약재료가 되고 나의 상처가 별이 되어 예수님 만난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37)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도 양대 산맥으로 나뉘어져 있다.
38) 첫 번째 산은 광야에 있는 시내(Sinai)산이고 두 번째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Zion)산인데 구약의 율법은 이처럼 어두움이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가 없었으며 빛 대신 예수님이 반드시 먼저 찾아 오셔야 한다는 이야기다
38) 여호와의 산에 오르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 첫 번째는 손이 깨끗해야 하는 것, 즉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위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으로 청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39)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는 이제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손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40) 두 번째는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탈한 데 두지 않아야 하는 것,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외적인 행위만 깨끗해서는 안 되고 그 마음과 뜻이 근본적으로 청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41) 마지막 세 번째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앞에 두 가지의 조건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인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다. 42)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43) 이것은 행위가 아닌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인데 나의 손이 얼마나 더러운 지를 알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나의 더러운 손을 씻고 깨끗한 손으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라는 의미다
44) 나의 마음이 불결하여 허탄한 것을 계속 생각한다면 나의 더러워진 마음을 공동체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창녀의 마음이 아닌 청결한 마음으로 여호와 산에 올라오라는 의미다
45)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를 얻는 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내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의미다
4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내가 누구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데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라고 분명히 세 가지 조건을 달아 놓았는데 그 결론이 요셉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47) 결국은 나의 행위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갈 자는 없고 오직 은혜로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48)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마음으로 음란을 행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다가 나보다 더 강한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나 갖은 고생을 하고 인생을 낭비하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우리들 공동체까지 찾아오셨나?
49) 내가 요셉처럼 살지 못했을지라도, 야곱처럼 속이는 인생을 살았을 지라도, 나의 피 묻은 손을 보며 회개하고 나의 창녀와 같은 마음을 회개하며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다.
50) 우리가 올라가야 할 산은 무섭고 두려운 신의 산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는 시온산이다.
51) 부르심을 받았으나 소명의식이 없고 언제라도 또 기회가 되면 목사의 직분을 내려놓고 그냥 주의 백성으로 살고 싶었기에 내 인생 가운데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기쁨 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사역을 하다가 여러 번의 치리를 받았다.
52) 내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늘의 문도 열리고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하늘의 문도 열리지가 않는다.
53)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 다윗에게도 닫힌 마음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도 굳게 닫혀 있는 마음에 문들에게 머리를 들라는 것은 시적 표현인데 빼꼼이 문을 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문을 활짝 문짝 전체를 들어올리라는 표현이다
54) 내 마음이 열려야 하늘의 문도 열라는 것처럼 목장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55) 남편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기 나눔을 할 때 무슨 얘기를 하나 얼굴을 빼꼼이 내밀고 남편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얘기이며 남편들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계집종처럼 힘든 이야기를 조잘조잘할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들어야 한다.
56) ‘왜 남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내 마음이 닫힌 마음이고 미갈과 같은 마음인 것이다
57) 성소의 문도 열리고 하늘의 문도 열린 것처럼 내 마음도 우리의 마음도 열려야 한다
58) 함께 기뻐하며 찬양하며 뛰어놀 때 자기 연민, 자기 상처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있는 우리의 자녀와 식구들이 너무나 많다
59) 먼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화가 나서 쾅쾅쾅 두드리지 말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사랑이 느껴지도록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의 노크소리가 되도록 자녀들의 방문 앞에서 또 남편의 방문 앞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문 밖에 서서 악쓰지 말고 고함치지 말고 우리의 소리가 음성이 되어 그 문이 열릴 때까지 함께 기도하는 저와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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