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스포츠계 지배 구도 중 추억의 라틴 마피아 4인방의 면모와 실상(김운용 前 IOC 수석부위원장이 전해준 이야기 중에서)]
향년 86세로 2017년 10월3일 작고하신 故 김운용 IOC수석부위원장(1931년 3월19일생)은 한국 스포츠외교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불세출의 최고 스포츠 외교관입니다.
그분은 저의 멘토였으며 대한체육회장/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장 재직 9년 간 특히 국제적으로 그분을 보필하며 그분의 스포츠외교족적과 업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직간접적으로 그분의 내공을 벤치마킹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세계스포츠계 3대축인 (1)IOC-(2)IFs(국제연맹)-(3)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모두 석권하신 세계스포츠지도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태권도를 정립하면서 (1)세계태권도연맹(WTF/1973년)창설총재로서 (2)월드 게임(The World Games/미국 Santa Clara 제1회대회)창설 국제월드게임협회(IWGA)회장과 (3)IOC인정종목 연합회(ARISF: Association of IOC Recognized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회장 (4)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회장 (5)IOC위원-집행위원-부위원장 (6)IOC TV위원회 위원장 (7)Olympafica 재단 집행위원장(8)대한태권도협회장 (9)국기원장 (10)대한체육회장/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장 (11)1999년 강원동계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12)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초대 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OlympAfirca재단 집행위원장 재직 시절 세네갈 Dakar 방문 시 당시 세네갈 대통령<우측>과 함께한 김운용 IOC부위원장)
김운용 IOC수석부위원장께서는 2000년 초 열린 IOC집행위원회에서 필자(Rocky YOON)를 당시 사마란치 IOC위원장에게 직접 천거하여 아시아 최초로 IOC평가위원회 위원(2008년 올림픽)으로 임명되어 IOC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활동하도록 국제스포츠외교관으로 처음 인정받도록 길을 열어 주신 분이었습니다.
(2008년 올림픽 IOC평가위원회 5개국 결선진출도시 방문을 마치고 IOC집행위원회 회의실에서 최종보고서 작성 후 당시 Samaranch IOC위원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는 필자와 짐바브웨 IOC위원 겸 IOC평가위원인 Tommy Sithole/2001년 3월)
1999년에는 당시 필자는 대한체육회/KOC국제사무차장으로 서울 개최 제109차 IOC총회 조직운영을 총괄하는 총회조직위원회 CEO역할을 맡기시어 국제스포츠행사 모든 부분을 직접 기획-운영-관리-총괄하는 중책 수행을 통해 종합 역량을 강화하게 하시고 당시 IOC사무총장(Mme. Francoise Zweifel)과 매일 직접 소통을 함으로 IOC행정과 IOC총회조직운영을 단기간에 리드해 갈 수 있는 개인적 위상과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생전에 집필하셨던 “김운용의 산고곡심(山高谷深)”이란 칼럼에서 쓰신 라틴 마피아 4인방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해 드립니다.
사마란치 시대 때 소위 라틴마피아 4인방이라고 불린 사람은 사마란치를 포함해서 아벨란제 FIFA 회장(브라질), 네비올로 육상회장(이탈리아), 그리고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ANOC 회장(멕시코) 등 4명이다. 모두 은퇴했거나 사망했고, 아직 남아있는 사람은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한 명뿐이다. 아직도 IOC 위원에 IOC의 Solidarity 위원장, ANOC 회장, 팬암스포츠기구(PASO) 회장 자리를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교육 수준은 별로이고, 연설문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길기만 길다고 한다. 대통령 경호직을 하면서 재산관리를 해서 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또 멕시코의 유명한 언론재벌로 알려져 있다. 한때 미국의 UPI통신사도 인수한 바 있다.
(Mario Vazquez Rana ANOC회장 겸 IOC집행위원과 함께)
실제로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의 대저택은 풀(pool) 등 호화시설에 경호원과 종업원이 40명에 달하고, 헬리콥터로 사무실에 출근한다고 한다. 식사는 밖에 나가 먹지 않고 사무실내 식당에서 먹는다. 실제보다는 조금 더 과장해서,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에게 비치는 것을 좋아하는, 소위 목에 힘을 주는 타입이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간다. 사마란치가 생전에 “만약에 마리오가 IOC 위원장이 된다면 그날이 IOC가 망하는 날”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등살에 못 이겨 사마란치는 네비올로에 이어 마리오도 IOC 위원을 시키려고 ASOIF 회장과 ANOC 회장만은 올림픽가족(Olympic Family)의 단결을 위해 예외적으로 당연직 IOC 위원으로 하자고 몇 년을 두고 IOC 위원들에게 간청을 했다. 결국 사마란치는 1991년 버밍엄(Birmingham) 총회에서, 마리오를 위해 측근들을 통해 사전작업을 해놓고도 표가 안 나올까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공개거수투표를 시키는 등 무리수를 두어 마리오를 IOC 위원으로 만들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마란치는 거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솔트레이크(SALT LAKE) 사건을 일으켜 미상하원 청문회에도 불려나가 망신을 당하는 등 고생을 한 것이다.
이때 멕시코에는 이미 2명의 IOC 위원이 있었고 IOC헌장을 적용할 경우 그 이상은 불가능할 때였다. 마리오 문제는 앤 공주(영국), 윌슨 위원(뉴질랜드) 등 영미계통이 앞서서 반대했지만 사마란치의 독단적인 안건처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를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10월 필자가 대한체육회 부회장,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로 있을 때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러 스위스 수도 베른(Bern)에 갔을 때다.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라 해도 이제 겨우 창설해서 아직 공인을 받지 못한 임의단체로 아무도 국제연맹 취급을 안 해줄 때였다. 사격연맹 회장 박종규가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을 사임하고 근신하고 있어 필자에게 대신 가달라고 사정을 해왔다. 별로 내키지 않아 사양했지만 간청에 못 이겨 ‘이길 자신은 없다’고 전제하고 서재관 사격연맹부회장, 정진우 영화감독, 박갑철 기자(조선일보), 신용석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끌고 갔다. 박종규 지시로 신용석은 사전에 로비를 위해 20여개국을 돌았었다. 이때 한국은 경제가 아주 나빴고 학생 소요도 많을 때였다. 마리오는 이때 멕시코 올림픽 위원장이며 사격연맹 회장이었고 부럽게도 부부동반으로 와서 세계사격연맹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등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때만 해도 멕시코는 1968년에 이미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 선진국이었다.
베른(Bern)의 IPU 즉, 국제우편연합 건물(국제법 시간에나 들은 이름)에서 총회가 있었고, 제안 설명은 마리오가 멕시코를 대표해서 먼저 스페인어로 했다. 아주 고답적으로 ‘멕시코는 팬암게임, 올림픽게임을 치렀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멕시코의 환대는 알 것 아니냐’고 하면서 선수 숙식비도 일당 10달러로 한다고 물량 공세로 나왔다. 필자는 한 8~9달러 정도 부르려다가 그것으로는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아 1억~2억 원 더 쓰더라도 이기는 것이 득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독단적으로 “우리는 하루 숙식(Room & Board)을 5달러에 한다”고 제안했다. 질문에 어느 나라 돈이냐 하기에 마리오도 미화 10달러, 나도 미화 5달러라고 다시 강조했다. 결국 오찬 후에 열린 표결에서 기적적으로 한국이 62 대 40으로 이겨 1978년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로 가져오게 됐다. 이때 마리오 등 멕시코 대표단은 인근 호수(Thun See)의 선상 파티에서 술만 잔뜩 퍼마시는 것을 보았고, 그 후 멕시코는 사격대회 유치를 다시 신청하지 않았다. 이 세계사격대회의 서울 유치를 영국의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 대기자는 그의 저서 <올림픽 혁명>과 에서 동북아 정치 지정학적 지각변동의 시작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