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2. 6. 7. 09:00

<서울올림픽개최를 향한 남북한간 줄다리기(Tug-of-War)>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북한측 8가지 요구사항 목록:

 

(1) 단일팀에 의한 북 남한 공동주최(Joint Hosting by North and South with a single national team)

(2) 코리아 올림픽이란 통합 타이틀 사용(The amalgamated title Korea Olympic Games)

(3) 평양과 서울간에 경기종목 평등분배(Sports Disciplines equally divided between Pyongyang and Seoul)

(4) 양측 수도에서 개폐회식 동시개최(Simultaneous Opening and Closing Ceremonies in both Capitals)

(5) 올림픽 헌장 하에 양측 도시들이 공동 보증서 작성(Host Cities to make joint guarantees to IFs under the Charter)

(6) 모든 선수, 임원, 여행객들의 육, , 공을 통한 자유로운 교환(Free Exchange in Travel for all Athletes, Officials, Journalists, and Tourists by Air, Sea, or Land)

(7) TV방영권수익금 재 분배(Redistribution of Television Profits)

(8) 공동조직위원회 구성(The Formation of a Joint Organizing Committee)

 

이러한 일방적인 8가지 제안항목들은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라도 개선하여 발전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IOC는 이 단계에서 개회식 때 올림픽 깃발을 앞 세우고 남북한 선수단이 공동 행진하는 것과 마라톤 및 도로 사이클 경기 코스가 휴전선을 가로질러 남북한 지역을 관통하는 것과 축구와 같은 단체종목의 예선전 몇 경기를 북한에서 개최하는 것에 한해서 제안한 바 있다. 올림픽공동개최는 결코 IOC의 요망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1985년 로잔에서 열린 첫 번째 회담결과 최종 코뮤니케(공동발표문)를 통해 추가적 논의가 필요하니 1986 1월 회담을 속개하자고 하였다.

 

이후 3 차례 회담이 속개되었으나 의견차이를 좁히는데 실패하여 회담이 결렬된 셈이었지만 4차례 명분뿐인 회담으로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들이 대가 참여할 수 있도록 명분을 얻는 데는 성공하였다.

 

국제적인 안보전문가와 테러분석가들로부터 가장 위험한 시기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2년 간 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어 중국과 소련선수단이 도착하고 나면 서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지대로 변할 것이었다.

 

한국은86 아시안게임 직후에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겪은 바 있었다. 불안감은 86년 겨울과 87년 여름 동안에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혈시위가 세계 각국의 신문과 방송을 타고 톱기사로 장식되었고 극적인 사진들까지 줄곧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불안에 따른 염려와 과잉대응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유한 미국에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고 북한과 휴전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휴전선(DMZ)은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미국 ABC TV 명 스포츠 해설가인 하워드 코셀(Howard Cosell)전쟁 중이나 다름 없는 국가에서의 올림픽 개최는 어불성설이다. 또한 160여 개국의 회원국 중 불과 60개국과만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다니 말이나 될 법한가?라고 비난의 포문을 열기도 하였다.

 

한국은 1980년 12월12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1980 7월 제22 IOC총회에서 8년 임기의 IOC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마란치(2011년 작고)로서는 이 모두가 고난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블록 국가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개최해야 한다고 연일 비판을 해댔다.

 

1984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4 ANOC총회에서 당시 소련 체육성 장관 겸 NOC위원장인 그라모프(Gramov)는 강한 어조로 서울올림픽 개최지 변경문제를 공론화하여 총회의 주요쟁점으로 몰고 가고 있었으며 열띤 공방이 계속되었었다.

 

결국 친한 파인 마리오 바즈케즈 라냐 ANOC회장과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의 서울올림픽 사수 전략이 대다수 NOC대표단의 호응을 받아 서울올림픽사수 멕시코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것으로 서울올림픽 개최지 변경논란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동서진영이 모두 참가(159개국)하는 화합과 전진(Harmony and Progress)의 대회가 되었으며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이념과 정치 갈등을 넘어선 대회로 높이 평가 받게 되었다.

 

 

 

 

Posted by 윤강로 (Rocky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