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8. 3. 8. 18:34

[올림픽과 정치(Olympics and Politics)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스토리 분석 Update]

 

 

 

1) The Olympics and the Politics(올림픽과 정치)
  

 

올림픽의 개념은 분명히 정치적 개념입니다. (The Olympic concept is clearly a political concept.)

 

올림픽의 신조를 나타내는 원칙적 조항들 중 하나가 유명한 고대 올림픽휴전(Olympic truce)사례입니다.


따라서 고대에는 올림픽이 개최되고 있는 동안에는 국가 간의 전쟁을 중지하고 그 대신 경기장에서 충실하고 우애롭게(loyally and fraternally)전투를 수행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올림피즘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라는 이론은 착각처럼 보이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근대올림픽역사의 증거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위선적이기(somewhat hypocritical)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방지하였거나 연기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전혀 없을뿐더러 그 반대로 히틀러의 독일을 홍보(showcase)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입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은 대회기간 중 이스라엘 선수들이 볼모로 희생당한 비극적 참사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세계로 그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로 활용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의기양양하고 평화로운 행진(its triumphant and peaceful march towards democracy)을 순조롭게 성공시킨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Nelson Mandela남아공 대통령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석하여 여러 해 동안 축출되었던 남아공의 올림픽무대 복귀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셈이 되었습니다.

 

올림픽은 동서진영의 힘의 균형을 배려하여 개최되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 동계올림픽은 서방진영 맹주인 미국의 레이크 플레시드(Lake Placid)에서 그리고 하계올림픽은 동구권 맹주인 소련의 심장부 모스크바(Moscow)에서 개최되도록 그 전략이 거중 조정된 셈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4년 뒤인 1984년 동계올림픽은 동구권인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그리고 하계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린 바 있습니다.

 

이는 올림피즘이 지향하는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차원의 배려인 듯 보입니다.



 


2)
올림픽 수난기:


‘평화 시 인류 최대제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지구촌 최대 수익창출의 보고(寶庫)이자 초대형 국가 백년대계 프로젝트’로 각광 받으면서 국가 간의 첨예한 ‘총성 없는 전쟁’ 각축대상목표물 제1호이기도 한 ‘올림픽대회’가 지난 지상 최고의 인기몰이와 더불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서 흥행행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최근 30여년간 지속되어 온 것이며, 각광을 받기 전인 50여 년 동안에는 그야말로 정치와 인종차별, 분단국 문제, 동서 간의 냉전, 세력다툼 등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이 올림픽대회 때마다 불거진 국제적 이슈들로 점철되기도 하였습니다.

 

1968년 제19회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는 아프리카국가들이 남아공과 로디지아(Rhodesia/현재 짐바브웨)의 인종분리정책에 항의하여 대회참가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IOC가 이슈가 된 두 국가의 대회참가를 거부한 바도 있습니다.



 




이로써 남아공은 1970년 제70차 암스테르담 IOC총회에서 올림픽역사상 처음으로 축출된 NOC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아공 NOC는 이후 21년만인 1991년 제97차 버밍엄 IOC 총회에서 재가입이 승인되어 다시 올림픽가족의 일원으로 복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또다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문제가 되어 아프리카 26개 국이 대회를 보이콧하였습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앞서 뉴질랜드 럭비 팀의 남아공 럭비 팀과의 원정경기계획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대회불참을 강행하였습니다.


1972
년 제20회 뮌헨올림픽은 ‘나치올림픽’으로 불린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처럼 유태인들이 시련을 당한 대회로 기록된 바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테러집단인 ‘검은 9월단’ 은 대회 중반인 9 5일 올림픽선수촌에 난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자동소총을 난사해 11명의 선수가 무참히 희생된 바 있었습니다.


 

 

 

 


올림픽은 30여 시간 중단되었다가 ‘3자위원회(Tripartite Commission/IOC, 국제경기연맹 및 국가올림픽위원회 대표들로 구성)’ 회의 결과 “대회는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The Games must go on.)라는결론을 도출하여 가까스로 남은 경기일정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명적인 사건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적대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보복과 복수혈전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각종 테러사태를 촉발하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 셈입니다.

 

따라서 국제스포츠경기 때마다 참가선수단 신변안전보호라는 거추장스러운 책임을 대회개최국이 떠맡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3)
올림픽과 분단국 문제:


(1)
동서독 이슈:



 




인종차별문제와 함께 올림픽을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분단국 이슈였습니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올림픽에 역사상 최초로 단일팀구성에 성공한 동독과 서독은 정치적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독일국가통일을 스포츠를 통해 먼저 성사시킨 셈입니다

 

 

그러나 동서독은 정치적으로 분단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쌍방간 상호 별개국가로 체제가 굳어져 결국 1968년 제19회 멕시코시티올림픽부터 다시 따로 팀을 구성하여 대회에 참가하여 온 바 있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2년 후인 1990103일 동서독이 1개의 독일로 통일되면서 동서독 선수단은 1964년 이래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다시금 하나의 독일국가 깃발 아래에 하나의 국가대표선수단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동서독 재통일 과정/출처: Wikipedia)



(2)
중국과 대만 그리고 홍콩 및 마카오 이슈:


(: 중국의 제1호 올림픽 사격 자유권총종목 금메달리스트/Heifeng Xu)



대만을 IOC에서 축출하라는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1958 IOC를 탈퇴한 중국(당시는 중공)은 대만이 참가하는 국제경기에는 출전치 않겠다며 20여년 간 국제스포츠 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통하여 다시 국제스포츠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원래 1910년 창설된 중국 NOC 1979년 제81차 몬테비데오 IOC총회에서 IOC회원국으로 새롭게 승인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란 국호와 청천백일기를 국기로 등록하여 1960년부터 IOC회원국으로 올림픽운동에 참여하여 왔습니다.

 

대만은 IOC의 중재협상하에 ‘중화대북’(Chinese Taipei)이란 호칭과 청색 및 홍색 매화꽃 문양의 이중테두리 안에 청천백일기를 떼어낸 태양문양과 오륜을 합성한 새로운 NOC로고를 사용하는 ‘울며 겨자 먹기’식 굴욕적 조건부 합의문에 동의함으로써 ‘2개의 중국’이 올림픽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중국에 반환되기 전 영국의 조차 지였던 홍콩은 1951년 제46차 비엔나 IOC총회에서 NOC로서 IOC회원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중국에 반환된 이후인 지금도 별도의 NOC로서 올림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로부터 중국에 반환된 마카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NOC로서 승인받아 아시안게임 등에는 선수단을 파견하는 등 아시아대륙 NOC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 IOC는 아직까지 IOC회원국 NOC로서 승인은 유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국이 IOC에 끊임없이 대만축출을 요구하자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 캐나다정부는 올림픽헌장 규정을 위배하면서까지 대만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해 국제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치 아니하여 간혹 국제대회 개최국 조직위원회가 대만을 ‘중화민국’으로 표기하거나 청천백일기의 국기를 사용할 경우 또는 한 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신분증발급(대만 교육부장관 등에 대한 장관 예우 성 신분증: G’카드) 사례가 있으면 즉각적인 항의와 강력한 시정조치요구 등 민감하게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 바 있습니다.


(3)
남북한 문제:




1953
NOC 창설 및 1957 IOC회원국 NOC 승인된 북한은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 때 호칭문제(한국은 KOREA, 북한은 NORTH KOREA)를 이유로 144명의 선수단을 철수시킨 바 있습니다.


1968 2월 제67차 그레노블 IOC총회는 북한의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호칭 사용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했으나, ‘남북통일 전까지 북한의 호칭은 올림픽대회에 관한 한 North Korea로 한다.’라는 브런디지(Avery Brundage/1952~1972 재직) IOC위원장의 제의를 결의하였다.

 

 

(Avery Brundage/1887~1975/출처: IOC 홈페이지)

 

 

그러나 북한은 끈질기게 호칭문제를 물고 늘어져 결국 1968 10월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68 IOC총회에서 그들의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KOC 50
년사 중에서)



 

4) 올림픽과 동서 양 진영의 힘겨루기:


1952
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부터 참가한 소련(현 러시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스포츠를 통한 국력우위를 과시하려 했으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격분한 서방진영(62개 국)의 대대적인 보이콧운동전개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80
년 모스크바올림픽은 강대국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 등 동구권국가들(14개국: 루마니아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 중 불참운동에 동조하지 않고 유일하게 참가) 1984 LA올림픽을 보이콧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LA1984
올림픽 불참국가 숫자는 소련의 보이콧에 동조한 14개 국과 다른 이유로 불참한 리비아, 이라크 등 모두 20개 국이었는데, 소련은 미국 내 반소운동이 격렬하다는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였고 대신 ‘우정대회’(Friendship Games)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불참했지만 1984 LA올림픽에는 사상최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함으로써 스포츠강대국대열에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2. 역대올림픽의 정치개입 사례



1916년 올림픽 : 베를린이 개최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개최 취소


1932 LA올림픽 : 만주국의 참가신청을 IOC가 거부


1936년 베를린올림픽 : 나치독일의 유태인 선수 및 관중의 경기장 출입금지조치/아일랜드 올림픽 참가 보이콧


 

 


 

 


1940년 및 1944년 올림픽 : 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개최 중단
1948년 런던올림픽 : 아랍권의 보이콧위협으로 이스라엘을 올림픽에서 추방
1952년 헬싱키올림픽 : 중국(중공) 초청에 항의하여 대만의 대회참가보이콧, 소련 40년만에 올림픽에 다시 참가
1956년 멜버른올림픽 : 소련의 헝가리침공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스위스등의 대회불참/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운하점령으로 이집트, 레바논, 이라크 등의 대회 보이콧/중화민국(대만) 국기(청천백일기)게양에 항의하여 중공(중국)퇴장/동서독 단일팀 참가
1960년 로마올림픽 : 대만의 IOC축출을 주장하며 중공(중국) IOC 탈퇴
1964년 도쿄올림픽 : IOC가 남아공의 대회참가를 거부함/북한 및 인도네시아 개회식에서 선수단 철수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 남아공 IOC에서 축출
1972년 뮌헨올림픽 :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올림픽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11명 피살, 대회 30여 시간 잠정 중단/IOC에서 로디지아 축출(1980년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로 개칭하여 IOC복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 뉴질랜드 럭비팀의 남아공 원정에 항의하여 아프리카 26개 국 대회 보이콧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격분하여 미국 등 서방진영 67개 국과 일부 공산국가 대회 보이콧

 

 





1984 LA올림픽 :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복수혈전으로 소련 등 동구권 14개 국 보이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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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보이콧 종결 자: 1988년 서울올림픽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은 정치적 보이콧이 배제된 온전한 올림픽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진영이 분단국 수도인 대한민국 서울에서 평화와 화합의 지구촌 인류축제를 통해 올림픽에서 정치개입의 고리를 끊는 분수령과 동시에 올림픽의 앞날에 서광을 비추어준 기념비적인 대회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공동개최무산으로 보이콧했으며, 에티오피아와 쿠바가 이에 동조한 바 있으나 상대적으로 미미한 숫자의 불참으로 ‘The Best Games to date’를 확고히 하는 올림픽사의 의미심장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8
년 서울올림픽대회 이후 올림픽대회에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보이콧이라는 망령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3.
올림픽유치와 정치 파워 그리고 스포츠외교:

그러나 스포츠에 대한 정치개입사례는 최근 올림픽유치경쟁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올림픽유치를 위해 유치후보도시들은 해당국 대통령들을 유치 단 대표일원으로 포진하여 정치적 공세를 전개함으로써 또 다른 차원의 ‘정치개입’을 이용한 올림픽대회 자국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외교는 정치와는 별개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와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스포츠에도 정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외교 또한 상존합니다

우리는 이를 스포츠외교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포츠외교는 각국이 세계스포츠 계에서 실질적 위상강화와 비교우위를 점하고 스포츠외교를 통한 국익극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고도의 전술·전략이자 가장 효과적인 추진동력이기도 합니다.

추진동력이 제 기능을 다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추진체 핵심부분이 중추적 위치에 자리매김하여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스포츠외교력과 위상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보여주고 있는 경기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References:

 

-현장에서 본 스포츠외교론 (윤강로 저)

-IOC홈페이지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