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2021. 7. 19. 20:45

[우리들교회 2021718일 주일설교 말씀 요약(사도행전 18: 12~ 17/ 성령의 문제)]

 

 

 

<사도행전18: 12~17>

 

12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While Gallio was proconsul of Achaia, the Jews made a united attack on Paul and brought him into court)



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This man," they charged, "is persuading the people to worship God in ways contrary to the law”)



14절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Just as Paul was about to speak, Gallio said to the Jews, "If you Jews were making a complaint about some misdemeanor or serious crime, it would be reasonable for me to listen to you)



15절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But since it involves questions about words and names and your own law--settle the matter yourselves. I will not be a judge of such things)



16절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So he had them ejected from the court)



17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Then they all turned on Sosthenes the synagogue ruler and beat him in front of the court. But Gallio showed no concern whatever)

 

 

<Prologue>

 

성령의 권면으로 성령의 백성이 되었지만 문제는 끝없이 일어난다.

“정의는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 교수인 마이켈 샌델이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새로 썼다.

책의 내용을 쉽게 요약하자면 학력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똑똑한데 재수 없는 놈이 되지 말고 돈과 상관없이 서로의 직업에 대해 너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태도를 가지자는 것이다.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이러한 태도의 문제는 이미 정치권력을 바꿀 정도로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정이 요즘은 화두이지만 그는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이론을 표방하는 정치 철학자인데 중요한 이런 공정의 문제를 우리는 성령의 문제로 풀어야 한다 생각한다.

 

<말씀 요약>

 

성령의 문제가 되는 문제는 어떤 문제인가?

 

1.   일제히 일어나는 문제입니다(12)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공정에는 지도자가 참 중요한 것 같다. 갈리오(Gallio)는 로마 정부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도 유명한 연설가였고 동생은 네로의 개인교사로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였다. 로마의 여러 속국 중에서는 아가야(Achaia)는 총독들이 가고 싶어 했던 지역으로 손꼽혔는데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아주 발달되고 안정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갈리오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정치가와 장군들은 어떤 직책을 맡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 다음 지위를 위한 준비기간으로 여겼다. 계속 높아져야 한다는 세속적 가치관을 가졌다. 우리 모두 그렇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벌 부부가 얼마 전 이혼을 했는데 그 이혼 사유는 그들의 결혼에서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니까 결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이 더 높아지고 나아지고 좋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한 갈리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1년의 임기 동안 아가야를 아무 문제없이 잘 관리하여 그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A.D. 49년에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는데 그 때 아굴라(Aqui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도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유대인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돈을 잘 번다. 똑똑하다. 그래서 로마 정가에서는 늘 경계심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늘 자기들끼리 싸워서 문제를 일으키니까 총독의 성공 가도에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이번에도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의 힘을 입어서 또 일제히 들고 일어나 동족인 바울을 고소하면서 싸우자고 법정으로 데려왔다.

갈리오가 유대 총독 되었을 때에”-총독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유대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이다.

바울은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 받고 사역을 했지만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의 문제이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비방하고 대적했던 유대인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일제히 한 일이 사도행전에 단 2번 나온다.

(1)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죽일 때이고 (2)고린도에서 바울을 대적해서 법정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스데반(Stephen)과 바울(Paul)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 같은 최고의 제자와 사도이니까 사단이 일제히 달려든 것이다.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강한 것이 맞다.

“일제히”로 번역된 헬라어 뜻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장소와 시간과 마음과 뜻과 모든 요소들이 하나가 되어서 동일한 열정과 분노로 바울을 대적했다는 뜻이다.

고린도에 거주하던 유대인 무리들도 결코 하나가 될 수가 없는데 그런 그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과 재능과 로마의 법까지 이용해서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서 바울을 대적한다. 이 세상은 모두가 한 쪽은 총독이고 한 쪽은 유대인 부류에 속했다. 약육강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또 유대인끼리도 엘리트와 저학력자로 나뉘어서 서로를 비난하면서 정말 징하게 싸운다(능력주의) 여기에는 공정은 존재할 수 없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어디나 능력이 왕 노릇하면 집이나 가정에서도 이혼을 하고 다 망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안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뭘 기대하겠는가? 성도의 길은 정말 좁은 길이다.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 하나 될 수 없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일제히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지금 바울에게도 일제히 달려드는 것이다. 너무 신기하지 않나? 이것은 바울이 답이라는 얘기다. 넘사벽. 인간이 악하고 음란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음란을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바로미터가 예수님이고 바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도 안 죽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도 죽였고 스테반도 죽였고 바울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의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어서 나타날까?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한다. 엘리트들에게 (네가 성공한 것은) 네 능력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들이 그런 말에 너무 극심한 반발을 한다. 또 저학력자나 중산층들에게 네가 성공 못한 것은 네가 능력이 없어서야라고 하면 그들도 역시 극심한 반발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능력주의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은 실패를 오로지 내가 못난 탓으로 돌리는 모욕까지 떠안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주된 핵심이 된다. 한마디로 부러워하고 무시하고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가난은 선이고 부자는 악인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밖에 없다. 공정이라는 것은 없다.

그는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환호하는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 균등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과 부를 가져야 된다는 사회주의가 맹신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닌 조건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부자와 빈자, 여러 계층이 만날 수 있는 공론의 장소를 확보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공론의 장을 확보하고 시민들이 거기서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고 계층과 상관없이 부딪힐 수 있는 그런 공간인 대중교통, 광장, 공립학교 같은 곳이 많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사립학교나 전용 VIP룸같이 부자들만 갈 수 있는 공간에서 살다 보면 빈자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음란한 죄인들이 차별 없이 모여서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하는 것보다 낫지만 그런 토론을 대중교통, 광장, 공립학교,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마이클 샌델은 아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이 분은 유대인이다. 성경을 잘 알 텐데 이분은 종교 란에 무 종교라고 썼다. 이 분은 666처럼 희대의 근사한 연구 때문에 너무 놀라지만 자기 죄를 모르면 차별 없는 나눔이 안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능력주의의 차별과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모두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있나? 샌델은 정의와 공정의 화두로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가 되었지만 저는 그가 공동체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너무 반갑다. 자전거를 이론으로 많이 공부했지만 자전거를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이 안다. 이론으로 공부해도 (안 타보면) 딱 넘어진다. (샌델이) 이론으로 말했다면 저는 이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가지고 와서 나누는 우리 교회의 목장이 진짜 실행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자, 부자, 배운 자, 못 배운 자에게 끝없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렇지만 같이 모여서 서로를 체휼하는 것은 죄인의 입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죄인의 입장이니까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가 정말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런 것을 나누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예를 들어 매를 맞고 쫓겨나도, 사랑받고 사랑하며, 그냥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얼마나 당신이 기여하는 줄 아느냐고 그 곳에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 줄을 아느냐고 끊임없이 주지시켜주는 공동체야 말로 샌델의 공동체 주의적 공화주의가 아니라 공동체 주의적 복음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 더 나아가서 모든 진영 논리와 지역감정에 반하는 주 안에서 차별 없이 자기 죄를 보는 공동체가 대안이다.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다. 즉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문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지금 일제히 일어나 나를 대적한다. 그냥 정신적, 육적 문제로 육해공군 모두가 산전수전 다 일어나서 일제히 나를 대적하는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성령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설픈 문제로서는 내 자신의 죄성을 결코 알 수 없기에 모든 문제가 일제히 일어나야만 완악한 내 죄가 깨달아지고 내가 예수께 항복하여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내 삶에 적용되어져 생명을 낳게 하는지가 경험되어지기에 이것을 성령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문제가 심각하고 진영문제, 지역감정도 심각해도 이것은 날마다 일어나는 부부문제, 자식문제에서 내 죄부터 보는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결단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뼈 속까지 죄인인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풍요로워질수록, 망할수록, 또 자유가 클수록, 잘 살수록, 못 살수록 다 문제가 많아지는 것이다.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똑같은 심판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의 사건이 되듯이 똑같은 문제 속에 말씀이 들리면 그 문제는 성령의 문제가 된다. 결코 못 살고 잘 살고의 환경이 아니다. 그런데 진영, 지역, 나라 모두 환경을 가지고 난리를 친다. 돈이 있다, 없다. 우리한테 잘했다, 못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이것을 그 누가 계속 가르쳐주겠는가?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말씀으로 죄를 보는 공동체밖에 없다.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가 중요하다)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유대인들이 고발한 내용이 굉장히 허술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들이 고발한 내용이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한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듯 일제히 덤비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허술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나를 죽이려고 일제히 덤벼드는 수많은 문제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도 별 거 아닌 문제들이다.

Ex)

(1) 2억을 빚을 져서 나는 죽고 싶은데 목장에 가보니 20, 70억 빚진 사람들이 웃으면서 목자를 하고 있다.

(2) 남편의 이상한 문자 하나를 보고 죽고 싶은데 목장을 가보니 23번 바람 피운 목자님이 또 웃으면서 목자를 하고 있다.

 

이 얘기는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성령의 문제가 되고 문제 자체를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의 고발이 얼마나 유치하고 허술하고 아이러니한지, 그리고 그게 무슨 공정인가? 고발한 내용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다. 예수가 없으면 죄를 모르고 그러면 매일 불공정 사회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정치 사회에서도 날마다 고발, 고소가 난무하는데 정말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다 살고 있는 것을 본다. 얼마나 허술하고 아이러니한 지를 날마다 가슴을 통탄하면서 보고 있다.

 

(적용# 1)

-온 세상이 일제히 달려들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문제가 있었나?

-나는 거기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자기 죄를 보는 목장이 세계적인 대안이며 기가 막힌 답이라는 것을 얼마나 인정하나?

 

내 문제를 다 성령의 문제로 가지고 가면

 

2.   의외의 도움으로 풀리게 하십니다(14)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기습적으로 잡혀온 바울이 법정에 섰다. 이 때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 고린도에서 이제 막 믿게 된 사람들, 그리고 아가야와 마게도냐의에 세웠던 교회들을 위해서 입을 열 때인가 보다 하면서 입을 열려고 했는데 갈리오가 바울을 대신해서 대답을 한다. 이처럼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 가족, 내 자녀가 아니라 정말 구원을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대신 말할 사람을 준비해주시기도 한다. 오늘 갈리오가 도와준다.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다. 아가야는 고린도를 품고 있는 더 큰 행정구역이다. 이 갈리오는 친아버지도 로마의 원로원이 되어 있고 자기가 실제적으로 성장한 양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고 철학자이고 수사학자이다. 그 형제인 세네카는 로마 황제의 철학 스승이다. 갈리오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갈리오가 총독이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고발을 한 것이다. 갈리오 총독이 재판권을 접수했는데 가만히 들어가 보니까 자기 로마 정부에서 시행하는 종교법에 위배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두 가지를 지적한다.

 

(1)바울이라는 사람이 사회를 어지럽혔나?

(2)그가 전한 내용이 비윤리적이냐? 하면서 재판을 기각 시켜버렸다.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무죄를 선언했다.  판례가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매 맞게 하시고 옥에 갇히게 하시고 이번에는 무죄로 판결이 나게 하셨다.

그러면 매 맞는 것은 나쁘고 저주인 것이고 무죄는 축복인가?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형편에 처해도 하나님의 순서에 토 달지 않고 순종할 사람으로 바울을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100% 옳으시기 때문에 나에게 주시는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데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나쁜 것은 저주라고 생각하니 성령의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재판관들이 어떤 시비를 놓고 판결을 할 때 법전다음으로 판례집을 본다.

심지어 외국의 경우에는 어떻게 판례를 했는지 참조한다. 그만큼 갈리오의 기각 사건과 무죄 선언은 사도 바울에 대한 내용과 인물 자체에 대해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갈리오라는 사람의 이 땅에서의 역할은 원로원이고 총독이고 다 떠나서 바울의 재판을 기각한 것이었다. 모든 법원과 사람들,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판결한 그거 하나 천국에 가서 남을 것이다. 갈리오의 판결이 그 이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가야에서의 무죄 판결로 말씀을 전할 때 로마가 중립을 지키기가 너무 쉬워졌고 그게 약효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전할 때는 그래도 위력적이었고 이후에 이 판례 때문에 로마 황제에게 까지 갈 수 있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의외의 도움이 너무 큰 역할을 했다. 우리 교회도 악하고 음란한 이 시대에 정말 말씀 묵상, 가정 중수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18년째 달려오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겠는가? 모함 받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생각 못한 의외의 손길들을 허락하셔서 말씀 묵상을 도우시고 가정들을 도와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억울해서 말하고 싶은데 그 때마다 내 입을 닫는 것은 내 생각이 죽어질 때 가능하고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은 이 시대의 순교이고 내 자아가 죽어지려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이 때 나의 모든 문제가 성령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이 문제가 변하지 않는 내 남편, 완악한 내 아내, 내 자녀에게 그리고 가장 결코 변하지 않는 나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그리고 고린도보다 몇 배 더 힘든 로마에 복음이 전해지는 성령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내 입을 닫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외의 도움을 다 예비해 놓으신다.

 

(적용# 2)

-나는 무조건 입을 열어 내 생각을 쏟아내야 시원한가?

-입을 열고자 할 때 구원을 위해 닫은 적이 있나? 닫았을 때 의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

 

3.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15~17)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여기서 갈리오가 판결문에 적은 언어(words)와 명칭(names)과 법(law)에 관한 문제는 법적 용어는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 언어는 로고스(Logos)이고 명칭은 오노마(Orma)이고 법은 노모스(Nomos)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개념은 일개 행정관이 재판 석상에서 표현하거나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어느 재판자리에서도 어느 재판관도, 어느 행정관도 이 단어나 이 개념을 말할 수가 없는 이런 내용과 개념을 말한 것이다. Why? 갈리오가 그렇게 철학과 수사학에 능했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닥친 문제가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너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성령께서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으로 성령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와 명칭과 법에 집착한다. 단어 하나에 이혼하고 명칭 하나에 분을 품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법 하나에 분노한다. 하지만 반대로 단어 하나에 결합하고 명칭 하나에 분이 풀리고 법 하나에 분노를 삼키게 되는 것이다. 이 언어와 명칭과 법이 너희 생각인지 아니면 말씀인지가 성령의 문제임을 판가름한다. 성령의 문제라면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주신다. 이것이 너희의 문제라면 갈리오처럼 손을 씻게 되는 것이다.

 

(예화)

 

똑같은 죄인임을 보게 하시는 조건의 평등이 우리를 성령 충만으로 가져가게 한다. 그래서 관계를 풀어 주셨다. 아내 집사님이 너희의 언어가 아닌 말씀에서 듣고 배운 언어, 구원의 언어를 쓰니(아내의 머리인 남편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내가 잔소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너희의 언어와 명칭과 법, 너희의 문제에서 성령의 언어와 명칭과 법으로 말하니 성령의 문제로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책을 단숨에 읽고 양육숙제를 하고 예배를 녹취하고 이것이 성령의 문제가 된 것이다.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나를 절대로 끝까지 도울 수가 없다. 부모님이나 부부나 남편이나 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그냥 기도할 대상이지 나를 도울 대상이 못된다. 갈리오는 바울을 도우려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소스데네(Sosthenes)를 때려도 상관하지 않는 냉혹하고 아주 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 문제가 너희의 문제인지 우리의 문제인지를 분별할 줄을 아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이 문제가 자기의 로마의 문제였다면 온 힘을 다해 도왔을 것이다. 요즘엔 지도자들 중에서도 상식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사람은 일본 문제를 돕고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를 돕는다. 그런데 일본이 왜 우리나라를 돕고 미국이 왜 우리나라를 돕겠는가? 그런 상식을 생각하라. 우리는 그냥 구원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한다. 세상은 다 이기적이다. 여기서 소스데네는 바울의 아픔에 함께 동참했다기보다 그리스보 이후에 회당장이 되어 헬라 유대인 동족들과 바울을 고소했다가 바울이 무죄가 되니까 동족 유대인들에게 법정에서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구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두들겨 맞아서 성령의 문제가 되게 하셨다. 맞았다고 나쁜 게 아니다. 맞아서 고전 1:1에 보면 바울의 최고 동역자가 되며 고린도 교회의 4번째 감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 맞았다고, 무죄가 되었다고 좋고 나쁜 것을 여러분들이 결정하면 안 된다. 하루하루 말씀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면 그게 하나님의 세팅의 구원의 순서에 들어있는 한 역할인 것뿐이다. 갈리오처럼 세상 법과 문제를 분별하며 이 문제가 로마의 문제인지 유대인들의 문제인지 분별하는데 우리는 어느 나라의 문제인지 모르고 맨날 욕만 하면 되냐구요..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사랑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구원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성령의 문제가 되는 비결이다. 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가 되어 이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될 때 성령께서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이다.

 

(적용 3)

 

-나는 집에서나 어디서나 어떤 언어와 명칭과 법에 뒤집어지나?

-혹은 교회에서 이해가 안 되는 언어와 명칭과 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구속사인가? 아니면 성령의 언어를 써서 문제가 해결된 한마디는 무엇인가?

 

 

<Epilogue>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이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내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그 사건이 성령의 문제가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데 성령의 문제가 되면 하나님은 의외의 도움으로 그 어떤 문제도 풀리게 하신다는 계시를 주시니 할렐루야 입니다.

 

1)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있다

2)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3)  내가 문제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4)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내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그 사건의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된다

5)  도덕의 유치원 시대에 이 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

6)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이 이 시대 순교다

7)  이세상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으므로 성령의 문제가 될 때 하나님은 의외의 도움으로 문제가 풀리게 하신다

8)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9)  공정의 문제를 우리는 성령의 문제로 풀어야 한다

10)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강한 것이 맞다.

11)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것이다.

12)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주된 핵심이 된다.

13) 한마디로 부러워하고 무시하고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14) 가난은 선이고 부자는 악인 것이라는 논리에는 옳고 그름 밖에 없고 공정이라는 것은 없다.

15) 능력주의의 차별과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모두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16) 죄인의 입장이니까 차별이 없는 것이다.

17) 어설픈 문제로서는 내 자신의 죄성을 결코 알 수 없기에 모든 문제가 일제히 일어나야만 완악한 내 죄가 깨달아 지고 내가 예수께 항복하여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내 삶에 적용 되어져서 생명을 낳게 하는지가 경험되어지기에 이것을 성령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18) 뼈 속까지 죄인인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풍요로워질수록, 망할수록, 또 자유가 클수록, 잘 살수록, 못 살수록 다 문제가 많아지는 것이다.

19) 문제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20)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똑같은 심판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의 사건이 되듯이 똑같은 문제 속에 말씀이 들리면 그 문제는 성령의 문제가 된다.

21)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22)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23)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성령의 문제가 되고 문제 자체를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의 고발이 얼마나 유치하고 허술하고 아이러니한지, 그리고 그게 무슨 공정인가? 고발한 내용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다.

24) 예수가 없으면 죄를 모르고 그러면 매일 불공정 사회에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25) 정치 사회에서도 날마다 고발, 고소가 난무하는데 정말 도덕의 유치원시대에 다 살고 있는 것을 본다.

26)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내 가족, 내 자녀가 아니라 정말 구원을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대신 말할 사람을 준비해주시기도 한다.

27)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 것이다.

28) 하나님은 100% 옳으시기 때문에 나에게 주시는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세팅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순서에 있는데 좋은 것은 축복이고 나쁜 것은 저주라고 생각하니 성령의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29) 너무 억울해서 말하고 싶은데 그 때마다 내 입을 닫는 것은 내 생각이 죽어질 때 가능하고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은 이 시대의 순교이고 내 자아가 죽어지려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인데 이 때 나의 모든 문제가 성령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

30) 오늘 나에게 닥친 문제가 너희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너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31) 구원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대한 문제라면 성령께서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32) 이것을 아는 것으로 성령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가 결정되는데 우리는 언어와 명칭과 법에 집착한다.

33) 단어 하나에 이혼하고 명칭 하나에 분을 품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법 하나에 분노하지만 반대로 단어 하나에 결합하고 명칭 하나에 분이 풀리고 법 하나에 분노를 삼키게 되는 것이다.

34) 이 언어와 명칭과 법이 너희 생각인지 아니면 말씀 인지가 성령의 문제임을 판가름한다.

35) 성령의 문제라면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주시는 것이며 이것이 너희의 문제라면 갈리오처럼 손을 씻게 되는 것이다.

36) 자기 죄를 못 보는 사람은 나를 절대로 끝까지 도울 수가 없다.

37) 우리는 그냥 구원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한다.

38) 세상은 다 이기적이다.

39) 무죄가 되었다고 좋고 나쁜 것을 여러분들이 결정하면 안 된다.

40) 하루하루 말씀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면 그게 하나님의 세팅의 구원의 순서에 들어있는 한 역할인 것뿐이다.

41)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구원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성령의 문제가 되는 비결이다.

42) 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가 되어 이 문제가 성령의 문제가 될 때 성령께서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이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