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외교2019. 10. 3. 18:39

[대한민국스포츠외교실록-올림픽대회에 정치력이 개입한 사례(21)]

 

 

<올림픽대회에 정치력이 개입한 사례>

 

‘평화 시 인류 최대제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지구촌 최대 수익창출의 보고(寶庫)이자 초대형 국가 백년대계 프로젝트로 각광 받아 왔다

 

국가 간의 첨예한총성 없는 전쟁각축대상목표물 제1호이기도 한올림픽대회가 지상 최고의 인기몰이와 더불어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써 흥행행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고공행진을 해 온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최근 30여년간 지속되어 온 것이며, 각광을 받기 전인 50여 년 동안에는 그야말로 정치와 인종차별, 분단국 문제, 동서 간의 냉전, 세력다툼 등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이 올림픽대회 때마다 불거진 국제적 이슈들로 점철되기도 하였다.

 

1968년 제19회 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는 아프리카국가들이 남아공과 로디지아(현짐바브웨)의 인종분리정책에 항의하여 대회참가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IOC가 문제의 두 국가의 대회참가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남아공은 1970년 제70차 암스테르담 IOC총회에서 올림픽역사상 처음으로 축출된 NOC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 NOC는 이후 21년만인 1991년 제97차 버밍엄 IOC 총회에서 재가입이 승인되어 다시 올림픽가족의 일원으로 복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또다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문제가 되어 아프리카 26개국이 대회를 보이콧하였다.

 

아프리카국가들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앞서 뉴질랜드 럭비팀의 남아공 럭비 팀과의 원정경기계획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대회불참을 강행하였다.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은나치올림픽으로 불린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처럼 유태인들이 시련을 당한 대회로 기록되었다.

 

 

 

 

 

팔레스타인 테러집단인검은 9월단은 대회 중반인 9 5일 올림픽선수촌에 난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자동소총을 난사해 11명의 선수가 무참히 희생되었다.

 

올림픽은 30여 시간 중단되었다가 ‘3자위원회(Tripartite Commission: IOC, 국제경기연맹 및 국가올림픽위원회 대표들로 구성)’ 회의 결과대회는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가까스로 남은 경기일정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사건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적대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보복과 복수혈전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각종 테러사태를 촉발하였다.

 

따라서 국제스포츠경기 때마다 참가 선수단 신변안전보호라는 거추장스러운 책임을 대회개최국이 떠맡게 되었다.

 

인종차별문제와 함께 올림픽을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분단국 문제였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에 역사상 최초로 단일팀구성에 성공한 동독과 서독은 정치적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독일국가통일을 스포츠를 통해 먼저 성사시킨 셈이다.

 

그러나 동서독은 정치적으로 분단상태가 장기화 됨에 따라 쌍방간 상호 별개 국가로 체제가 굳어져 결국 1968년 제19회 멕시코시티올림픽부터 다시 따로 팀을 구 성하여 대회에 참가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동서독이 19891개의 독일로 통일되면서 동서독 선수단은 1964년 이래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다시금 하나의 독일국가 깃발 아래에 하나의 국가대표선수단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대만을 IOC에서 축출하라는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1958 IOC를 탈퇴한 중국(당시는 중공)은 대만이 참가하는 국제경기에는 출전치 않겠다며 20여년 간 국제스포츠 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통하여 다시 국제스포츠무대에 등장하였다.

 

원래 1910년 창설된 중국 NOC 1979년 제81차 몬테비데오 IOC총회에서 IOC회원국으로 새롭게 승인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화민국이란 국호와 청천 백일기를 국기로 등록하여 1960년부터 IOC회원국으로 올림픽운동에 참여하여 왔던 대만은 IOC의 중재협상 하에중화대북이란 호칭과 청색 및 홍색 매화 꽃 문양의 이중테두리 안에 청천백일기를 떼어낸 태양문양과 오륜을 합성한 새로운 NOC로고를 사용하는울며 겨자 먹기식 굴욕적 조건부 합의문에 동의함으로써 ‘2개의 중국이 올림픽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중국에 반환되기 전 영국의 조차 지였던 홍콩은 1951년 제46차 비엔나 IOC총회에서 NOC로서 IOC회원국으로 승인 받았으며, 중국에 반환된 이후인 지금도 별도의 NOC로서 올림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로부터 중국에 반환된 마카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NOC로서 승인 받아 아시안게임 등에는 선수단을 파견하는 등 아시아대륙 NOC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IOC는 아직까지 IOC회원국 NOC로서 승인은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이 IOC에 끊임없이 대만축출을 요구하자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 캐나다정부는 올림픽헌장 규정을 위배하면서까지 대만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해 국제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지금도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치 아니하여 간혹 국제대회 개최국 조직위원회가 대만을중화민국으로 표기하거나 청천백일기의 국기를 사용할 경우 또는 한 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신분증발급(대만 교육부장관 등에 대한 장관예우성 신분증: ‘G’카드) 사례가 있으면 즉각적인 항의와 강력한 시정조치요구 등 민감하게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1953 NOC 창설 및 1957 IOC회원국 NOC 승인)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 때 호칭문제(한국은 KOREA, 북한은 NORTH KOREA)를 이유로 144명의 선수단을 철수시킨 바 있다.

 

“19682월 제67차 그레노블 IOC총회는 북한의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호칭 사용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했으나, ‘남북통일 전까지 북한의 호칭은 올림픽대회에 관한 한 North Korea로 한다.’라는 브런디지 IOC위원장의 제의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끈질기게 호칭문제를 물고 늘어져 결국 1968 10월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제68 IOC총회에 서 그들의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KOC 50년사 중에서)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부터 참가한 소련(현 러시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스포츠를 통한 국력우위를 과시하려 했으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격분한 서방진영(62개 국)의 대대적인 보이콧운동전개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강대국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 등 동구권국가들(14개국: 루마니아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 중 불참운동에 동조하지 않고 유일하게 참가) 1984 LA올림픽을 보이콧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LA올림픽 불참국가 숫자는 소련의 보이콧에 동조한 14개국과 다른 이유로 불참한 리비아, 이라크 등 모두 20개국이었는데, 소련은 미국내 반소운동이 격렬하다는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였고 대신우정대회(Friendship Games)’를 개최한 바 있다.

 

반면 중국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불참했지만 1984 LA올림픽에는 사상최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함으로써 스포츠강대국대열에 올라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Posted by 윤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