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마음씀
우리들교회 2021년 8월22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19: 1~ 7/ 성령의 임하심)
윤강로
2021. 8. 24. 10:44
[우리들교회 2021년 8월22일 주일예배 말씀요약(사도행전 19: 1~ 7/ 성령의 임하심)]
<사도행전 19: 1 ~ 7>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While Apollos was at Corinth, Paul took the road through the interior and arrived at Ephesus. There he found some disciples)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So Paul asked, "Then what baptism did you receive?" "John's baptism," they replied)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Paul said, "John's baptism was a baptism of repentance. He told the people to believe in the one coming after him, that is, in Jesus.")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On hearing this, they were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Jesus)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When Paul placed his hands on them, the Holy Spirit came on them, and they spoke in tongues and prophesied)
7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There were about twelve men in all)
<Prologue>
우리가 땅의 씨앗을 뿌리면 생명을 맺습니다. 과학자들이 씨앗의 색깔과 수분 단백질 등의 성분을 백 프로 똑같이 만들어서 심었습니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맺어졌었을까요? 아무리 양육을 해도 조건을 똑같이 해도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생명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은혜는 가르친다고 되지 않습니다. 제자 양육은 성령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순서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제자 양육은 성령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개미처럼 수고해도 썩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임하신 성령이었고 에베소에서 성령 강림이 임하시게 됩니다. 제자 양육과 이어지는 본문이기에 제자 양육은 성령의 임하심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임하심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 요약>
1. 구원에 분별에 절대적입니다.
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Paul)에게 아볼로(Apollos)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큰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는데 원래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Ephesus)로 가고 싶었지만 베드로의 구역 임을 의식해서 마게도니아(Macedonia) 유럽으로 갔습니다.
2차 여행 마지막에 들러서 강론했더니 유대인들이 오래 머물라고 청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오겠다고 했었고 돌고 돌아 다시 왔습니다. 어떻게 분별 했을까요?
고린도 후서(2 Corinthians) 7장 10절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하는 것이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 살짝 근심을 한 것 같아요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하버드입니다 너무 탁월합니다. 그런데 이 신약 성경에 히브리서가 저자 미상이지만 아볼로 저자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를 쓸 정도이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의 문체가 다릅니다. 대단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Exodus)-레위기(Leviticus)-신명기(Deuteronomy)의 주석을 달았는데 레위기에 단 주석은 아주 특별한 주석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좔좔 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볼로의 이름을 안 남겨주셨습니다. 디모데전후서도 바울이 썼는데 디모데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아볼로가 그곳의 후임으로 갔는데 말을 엄청 잘합니다. 바울과 비교하면서 아볼로에게 뻑이 갔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 파당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를 유리그릇처럼 다루었다고 합니다.
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역을 했음에도 아볼로 이름이 바울의 마지막 로마서 16장에 안 나옵니다. 구속사를 잘 아는데도 한 마음이 안되었습니다. 아볼로의 언어와 명칭과 법이 그를 사로잡고 넘어가지 못하는 본인의 지식 때문에 여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내가 바울보다 잘났다’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아볼로에 대한 결론이지만 왜 이때가 에베소에 올 때일까요? 에베소가 아주 황금어장이지만 항상 십자가의 지혜와 타이밍을 분별하는 바울입니다. 고린도에서 가르치다 보니 두 도시가 비슷하고 돈 많고 음란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했고 양육의 시간을 내니 열매가 많았어요. 의로운 아덴(Athens)에서는 열매가 없어서 떠났잖아요. 그러니 이제 고린도(Corinth)는 1년6개월 있었는데 에베소(Ephesus)에 복음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가 떠난 에베소는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했잖아요.
에베소가 근심이 되어서 갈라디아(Galatia) 지방 다니는 중에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Cilicia) 다소(Tarsus)도 못 가고 급히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분별했습니다. 바울은 가고 싶은 에베소가 그때 베드로 사도 구역이라고 안 갔잖아요. 너무 가고 싶었는데 성령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에베소가 생각보다 전도가 안 되었어요 또 분별했습니다. 최고의 아볼로가 전할 때도 대단하게 여기니 그렇기도 했겠고 남의 터에 가는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둘은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볼로가 인도받아 추천을 받고 고린도를 떠났고 바울은 에베소가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 같아 걱정되어 모두의 마음을 다 읽었잖아요.
복음을 전한다고 마구 가고 이러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전할 때라고 성령이 올 때는 급히 갔습니다. 에베소가 거점지라는 것을 알고도 때마다 분별을 합니다. 모두 성령의 작별로 윈윈(win-win)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볼로의 말을 듣고 좋다고 하니까 걱정되는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바울은 죽이려고 하고 아볼로는 좋다고 하는데 바울은 박해 받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를 담당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탁월함은 있지만 2%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연관되기 때문에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바울에 정확한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임하신 분별이 역사를 가지고 옵니다. 내 생각으로 한 판단이 한 영혼을 좌우합니다.
(적용#1)
-성령의 임하심으로 항상 분별하나? 내 생각으로 판단하나?
-나는 주변 사람들이 편하다고 하나? 어려워하나? 나는 뒤끝이 있나? 없나?
2.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를 만났는데 예수님의 제자를 의미하지만 아볼로의 제자인지 아시아를 관장하는 베드로 제자인지 모르는 제자를 말합니다. 만났다는 말은 찾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반기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인데 가장 최근에 떠난 사람이 아볼로잖아요? 그러니까 근심이 되어서 이 제자들부터 찾아가 만났습니다.
2절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제 진단을 해야 되죠. 질문으로 양육이 시작됩니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없던 기록이 나옵니다. 늘 강론을 했잖아요 이곳에서는 성령을 받았는지 먼저 묻고 사역을 시작합니다. 아볼로 제자들이 교만했거든요. ‘너희가 도대체 누구 제자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의 계심을 듣지 못했다’ 바울의 근심이 맞았습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유심히 보니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성령의 받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고 에베소가 힘든 곳이기 때문에 바울이 오자마자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같은 곳은 음란하고 그냥 세상 세력에 찌든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라고 보는 곳이기 때문에 성령의 임하심이 없이는 에베소 같은 내 남편 자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단의 나라가 너무 강하면 우리는 성령 없이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같은 저 인간의 마음에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럼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원한다고 받아 지나요? 성령을 돈의 사려고 했다고 책망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구제하고 헌금하면 성령 받나요? 돈으로 살 수도 간절히 원한다고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합니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습니다. 믿을 때라는 말은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이 조건이 되면 행위가 됩니다. 믿을 때라는 말은 동시적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믿었다면 성령을 받았을 텐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동시에 성령의 열매와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교회와 양육을 받아도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사람의 제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어떤 제자들이 성령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믿기 때문에 어떤 수치도 당할 수도 있는 것이고 죽기보다 싫은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분은 기도와 성경 필사에 전념하시는 제자 반열에 있는 분입니다. 실제로 아내가 마지막 왔을 때 정신과를 가자고 했는데 내가 왜 거기를 가냐고 3시간을 따지고 3시간을 반박하고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나를 용서해야 한다고. 아내를 향해 용서와 사랑을 외치니까. 아내가 그 이후로 모든 연락을 끊고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도대체 누구 제자냐?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의 수치를 인정하고 죽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분은 그렇게 열심히 성경 필사를 하고 보고 경건하게 지내는데 아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이렇게 요새 간수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고백했는데 죽기보다 싫은 것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기보다 싫은 것이 정신과를 가는 것이고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과하는 것, 공동체에 고백하는 것은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도 아내와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생각해 본 적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오늘 내게 말해주는 말씀을 믿으시면 됩니다. 발버둥 치는 것도 말씀을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효과적으로도 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보다 악한 시대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간파했습니다. 어떻게 간파 했나요? 험한 전도여행을 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아볼로를 분별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제자도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신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로서 제자로서 무서운 열심 뒤에 감추어진 빈자리 그것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한 이 질문은 실전적인 질문이고 그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목사에게 ‘구원의 받으셨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적용#2)
-내 실체를 드러내 주었던 질문은 어떤 질문이었나?
-지금 나에게 죽기보다 싫은 적용은 무엇인가?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맞다고 말하는데 나 혼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을 받았나?
-여러분은 누구의 제자인가? 내가 제일 기억나는 스승은?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절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분별을 제대로 한 거예요 삶의 능력도 적용도 자신의 수치를 드러냄도 없는 어떤 제자들을 향해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느냐?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la)가 아볼로(Apollos)를 양육한 것처럼 바울은 이 어떤 제자들을 양육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육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계속해야 돼요. 질문을 통해 자신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살핌으로 양육이 되어지는 거죠. 바울은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 받았냐?’그러니까 제자들이 아주 자신 있게. 요한의 세례요. 이거는 ‘우리는 아볼로 제자입니다’ 이거하고 똑같아요 이 대단한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 대답을 듣고. 바울은 그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이 믿는 요한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울이 인용한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마태복음/Mattew 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여기 성령 세례 나오죠. 요한의 세례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요 우리는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 요한의 세례가 어떠한지 지난번 설교에서 ‘회개하라 독서의 자식들아’를 묵상했어요 그런데 이 요한의 메시지가 아직 오지 않은 소리, 예배하는 자의 소리라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자체가 이제 이미 왔잖아요. 그렇죠 그게 예배하는 자고 이미 임한 메시지에요 그 능력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죠.